카스티야의 두 왕실 거처는 불길한 왕조의 반복을 통해 역사 속에서 서로 연결됐다. 아레발로에는 가톨릭 여왕 이사벨의 어머니 포르투갈의 이사벨이 살았다. 후대는 그를 남편을 잃은 뒤 이성을 잃은 왕비로 기억했다. 약 반세기 뒤 이사벨의 딸이자 카스티야의 합법적 군주였던 후아나 1세는 토르데시야스에 머물도록 강제됐고, 결국 ‘광녀 후아나’라는 이름으로 대중의 기억에 남았다.

두 여성 사이에는 유럽사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 가운데 한 명인 이사벨 1세가 있었다. 그는 병들었다고 여겨진 어머니 곁에서 어린 시절의 일부를 보냈다. 자신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에는 딸이 왕국을 다스리려 하지 않거나 다스릴 수 없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유언으로 정했다.

같은 왕가의 외할머니와 외손녀가 모두 정신 질환과 연결되고 궁정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은 유전병이라는 설명을 쉽게 불러온다. 그러나 남아 있는 기록은 그렇게 단순한 결론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자료에는 슬픔과 고립, 분노, 위축이 나타나지만, 동시에 왕위에 권리를 가진 여성을 ‘통치 불능’으로 규정함으로써 강력한 남성들이 직접 이익을 얻었던 궁정의 정치도 담겨 있다.

아레발로 이전의 왕비

포르투갈의 이사벨은 1428년에 태어나 1447년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결혼했다. 그는 열아홉 살가량이었고 국왕은 이미 마흔을 넘겼다. 딸 이사벨은 1451년, 아들 알폰소는 1453년에 태어났다.

아레발로의 병든 과부로 알려지기 전, 이사벨은 정치 행위자였다. 그는 수년간 후안 2세의 궁정과 정부를 장악한 총신 알바로 데 루나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카스티야 연대기들은 왕비가 남편으로 하여금 총신의 체포를 명하게 하는 데 중요한 몫을 했다고 기록했다. 루나는 1453년 6월 바야돌리드에서 처형됐다.

프랑스어권 연구는 이 시기의 이사벨을 다시 드러냈다. 기슬렌 델베키오는 후안 2세 주변 왕비들에 관한 연구에서 포르투갈 출신 왕비가 카스티야 귀족 동맹들이 거듭 실패한 일을 해냈다고 강조한다. 그는 총신이 국왕에게 행사하던 지배력을 무너뜨렸다. 이 사건들 속의 이사벨은 결단력 있고 권력 관계에 밝으며 지속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다. 후대의 ‘아레발로의 미친 왕비’라는 수동적인 형상과는 크게 다르다.

후안 2세는 1454년 7월 사망했고, 이사벨은 스물여섯에 과부가 됐다. 후대의 서술은 건강 악화를 출산, 남편의 죽음, 루나 처형에 대한 죄책감과 연결했다. 현대의 저자들은 산후우울증, 중증 우울장애, 정신병적 장애를 추정해 왔으나 어느 것도 입증할 수 없다. 중세와 근세 초기의 기록은 현대적 의미의 임상 관찰이 아니었으며, 광기나 우울, 정신적 소외라는 말에는 의학적 뜻뿐 아니라 도덕적·종교적·정치적 판단이 함께 들어 있었다.

은거가 완전한 소멸은 아니었다

국왕이 죽은 뒤 이사벨은 어린 이사벨과 알폰소를 데리고 아레발로에 자리 잡았다. 훗날의 가톨릭 여왕은 1454년부터 약 1461년까지 재정적 어려움과 엔리케 4세 치세의 정치 불안 속에서 그곳에 살았다. 두 아이가 궁정으로 불려가면서 어머니와 자녀는 떨어졌다.

전통적인 전기는 과부 왕비가 남은 생애 내내 아레발로에 갇혀 현실과 거의 완전히 단절됐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행정 문서는 더 복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사벨은 자신의 가솔 조직을 유지했고, 수입을 관리했으며, 자녀의 재산권을 지키고, 영지 분쟁에 대리인을 통해 개입했다. 약 예순여섯 살이던 1494년에도 그의 대리인들이 법적 절차에서 이익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이 건강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심각한 증상이 반복됐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4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모든 판단 능력을 잃었다는 설명과는 맞지 않는다. 아레발로는 훗날 후아나에게 강요된 감옥과도 같지 않았다. 정치 중심에 접근하는 데 제약은 있었지만 이사벨은 수입과 하인, 재산에 대한 일정한 권한을 유지했다.

그는 1496년 8월 15일 아레발로에서 사망했다. 딸은 훗날 유해를 미라플로레스 카르투시오 수도원으로 옮겨, 힐 데 실로에가 조각한 화려한 설화석고 무덤에 후안 2세와 나란히 안장했다.

갑자기 없어서는 안 될 후계자가 된 후아나

후아나는 1479년 톨레도에서 태어났다.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아라곤의 페르난도의 셋째 자녀로, 처음부터 왕위 계승자로 길러진 인물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기록에는 심각한 정신 장애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내용이 없다. 그는 카스티야 왕녀에게 요구되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통치자가 아니라 외교 결혼의 주인공으로 준비됐다.

1496년 후아나는 ‘미남공’ 펠리페로 알려진 합스부르크의 필리프와 결혼해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로 떠났다. 열여섯 살에 자신의 언어와 가족에게서 떨어져, 부모의 이해관계와 늘 일치하지 않는 궁정으로 들어갔다. 필리프의 외도와 잦은 부재는 결혼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어진 죽음들이 그의 정치적 가치를 완전히 바꿨다. 오빠 후안이 1497년, 언니 이사벨이 1498년에 사망했고, 언니의 어린 아들 미겔 다 파스도 1500년에 죽었다. 왕위와 거리가 멀었던 왕녀가 갑자기 카스티야의 후계자가 됐다.

그때부터 후아나의 행동에 관한 모든 보고는 헌정적 의미를 갖게 됐다. 분노의 폭발은 더 이상 부부 사이의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침묵, 질투, 거부는 후아나가 직접 다스릴지, 필리프가 아내를 통해 통치할지, 또는 페르난도가 이사벨과 함께 30년 가까이 운영한 왕국을 계속 장악할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메디나 델 캄포의 성문

가장 유명한 위기 가운데 하나는 1503년에 일어났다. 필리프는 네덜란드로 돌아갔고 임신한 후아나는 카스티야에 남았다. 남편과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원한 그는 메디나 델 캄포 성을 나가려 했다. 성문이 닫히자 몇 시간 동안 문 가까이에 머물며 출발을 막는 사람들과 충돌했고, 그중에는 어머니도 있었다.

불안한 장면이지만 의미가 하나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심리적 위기, 배우자에 대한 의존, 감정 조절의 어려움을 보여줄 수 있다. 반대로 구금에 저항하며 자신의 집과 궁정으로 돌아갈 권리를 요구한 왕실 여성의 행동일 수도 있다. 후대 연대기 작가들은 점점 모든 행위를 한 문장으로 설명했다. 후아나가 필리프를 지나치게 사랑했다는 것이다.

부르고뉴 궁정에는 필리프의 연인으로 의심한 여성을 공격하거나 머리카락을 잘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페드로 마르티르 데 앙글레리아와 알론소 데 산타 크루스는 이 장면을 오래 남겼다. 그러나 페드로 마르티르는 후아나가 이미 권력에서 배제된 뒤 출판에 앞서 편지를 수정했고, 산타 크루스는 아들 카를 5세 아래에서 공식 연대기를 썼다. 어느 쪽도 중립적인 의무 기록은 아니다.

이사벨의 유언이 실제로 말한 것

이사벨 여왕은 1504년 11월 사망하면서 후아나를 카스티야의 합법적 계승자로 인정했다. 다만 후아나가 왕국에 없거나, 국내에 있더라도 통치에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거나 할 수 없을’ 경우 페르난도가 왕국을 관리하도록 했다.

이 조항은 흔히 어머니가 딸에게 내린 정신과 진단처럼 소개되지만 그렇지 않다. 문구는 부재, 의지 부족, 능력 부족을 모두 포함했지만 질병을 명시하지 않았다. 정치적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필리프는 카스티야의 실권을 원했고, 페르난도는 자신이 30년간 유지한 지위를 지키려 했다. 후아나를 무능력자로 보이게 하는 것은 두 남성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1505년 살라망카 협약은 ‘건강상의 부적합과 장애’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썼다. 모호함 덕분에 후아나가 잠시 아팠는지, 영구적으로 통치 불능이었는지, 의도적으로 밀려났는지 판단하지 않은 채 정부를 넘길 수 있었다.

연대기와 황제

클라라 칼로게라키스는 프랑스 학술지 『e-Spania』에 발표한 연구에서 왕실 연대기와 외교 서신, 부르고뉴 여행기를 비교했다. 같은 행동이 저자의 정치적 충성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을 부여받았음을 보여준다.

카를 5세 시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카를이 카스티야를 통치할 때 왕국의 합법적 여왕인 어머니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공식 서사는 어머니의 배제를 정당화하면서도, 아들이 바로 그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정통성은 약화시키지 않아야 했다.

칼로게라키스는 또 다른 민감한 문제를 지적한다. 중세 말과 16세기 유럽에는 광기가 한 가문 안에서 전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이미 있었다. 후아나의 외할머니 포르투갈의 이사벨은 바로 그 병을 앓았다는 의심을 받았다. 유전을 강조하면 카를 자신에게도 불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황제의 연대기 작가들은 대신 후아나의 상태를 필리프에 대한 과도한 사랑으로 설명했다. 열정은 어머니를 통치에서 탈락시키면서도 아들에게 유전 질환의 오명을 남기지 않았다.

과부와 관, 오래 남은 전설

필리프는 1506년 9월 25일 부르고스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후아나는 여섯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남편의 관을 그라나다까지 동행하려 한 결정은 그의 전설을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후대의 이야기는 후아나가 반복해서 관을 열고 죽은 남편과 대화했으며 다른 여성들이 시신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시대 증언은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슬픔에 압도된 왕비를 그렸고, 다른 이는 반응이 절제됐다고 보았다. 산타 크루스조차 놀라운 침착함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기록한 반면, 페르난도는 딸의 시신에 대한 집착이 매장을 방해한다고 보고했다.

이 모순은 중요하다. 후아나가 건강했다는 증거는 아니지만 애도가 선택되고 해석되며 다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임신한 과부의 슬픔은 먼저 정치적 논거가 됐고, 수세기 뒤 낭만주의적 구경거리로 변했다.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의 통제권을 되찾아 1509년 딸을 토르데시야스 궁전에 두었다. 후아나는 1555년 4월 12일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516년 페르난도가 죽은 뒤 카를이 왕권을 행사했지만, 후아나는 법적으로 왕위를 빼앗기지 않았다. 아들의 정통성이 어머니의 권리에 의존했기 때문에 공식 문서에는 그의 이름이 계속 사용됐다.

질병과 유폐, 정치적 효용

논쟁의 역사는 현대 정신의학보다 오래됐다. 1889년 알로이스 하이스는 프랑스 금석문·문학 아카데미에서 후아나의 광기는 페르난도와 카를이 꾸며낸 것이라는 구스타프 베르겐로트의 주장에 반박했다. 하이스는 1503년까지 명백한 증상이 있었다고 보았다. 이 논쟁은 오늘날 대중 서술을 지배하는 두 극단을 만들었다. 완전히 제정신인 음모의 희생자와 완전히 통치 불능인 여왕이다.

사료가 가리키는 곳은 더 불편한 중간 지대다. 후아나는 실제로, 때로는 심각한 정신 질환을 겪었을 수 있다. 동시에 그는 고립되고 강요받았으며, 그의 배제로 권력을 얻은 사람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됐다. 진짜 고통과 정치적 조작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포르투갈의 이사벨에게도 같은 주의가 필요하다. 행정 활동이 질병에 관한 증언을 지우지는 않으며, 질병 증언이 판단 능력을 보인 시기를 없애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외할머니와 외손녀가 같은 장애를 앓았거나 그 장애가 가톨릭 여왕 이사벨을 통해 유전됐다는 증거는 없다. 이사벨 1세 자신에게는 이에 견줄 만한 정신적 통치 불능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정치 언어의 반복이다. 아레발로와 토르데시야스에서 여성의 고통은 통치 자격에 대한 판단으로 번역됐다. 광기는 질병일 수 있었지만 도덕적 판결, 왕조의 위험, 법률적 도구가 되기도 했다.

세대를 거쳐 가장 분명히 전해진 것은 진단 가능한 질환이 아니라 불편한 왕실 여성을 통제하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궁정에서 멀리 보내고, 고립 자체를 증거로 제시하며, 그들의 이름으로 다스린 남성들이 역사를 쓰게 하는 방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