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2월 1일, 찰스 디킨스는 스위스에 사는 친구에게 영국 시골 저택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편지로 전했다. 로잔에서도 그 사건을 이야기하느냐고 묻더니 자신의 해석을 내놓았다. 어떤 형사도 그 생각을 바꾸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소설가의 확신은 눈에 띈다. 그때까지 수사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희생자는 서머싯과 윌트셔의 경계 가까운 로드 힐 하우스에서 살해된 프랜시스 새빌 켄트였다. 1860년 6월 30일 드러난 사건은 부유한 가정의 내부를 대중 앞에 펼쳐 놓았다. 사라진 아이, 의심받은 하녀, 찾지 못한 옷 한 벌은 경찰 수사와 신문 추측, 의회에까지 이른 논쟁의 재료가 되었다.

점잖은 집 안에서 일어난 범죄

가족이 새빌이라고 부르던 아이는 세 살로, 네 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밤사이 아이 방에서 사라졌다. 아침에는 저택 부지의 야외 변소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 아이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사실에서 범인을 찾아가는 길은 훨씬 불확실했다.

아버지 새뮤얼 켄트는 공장 감독관이었다. 집에는 첫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들과 재혼한 아내,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자녀들, 그리고 가사 노동자들이 살았다. 새빌의 십대 이복누나 콘스턴스는 첫 결혼에서 태어난 자녀였다. 이런 가족 관계는 나중에 범행 동기를 설명할 때 중요해졌지만, 가족 구성만으로 동기가 입증되지는 않는다.

안전해 보이던 집에서 살인이 일어나 더욱 충격적이었다. 의심은 방 구조와 일상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질서와 보호의 공간으로 여겨지던 곳에서 위험이 나왔다는 인상이었다. 누가 드나들 수 있었는지, 누가 어디서 잤는지, 누구의 말을 믿을 수 있는지가 켄트 가족을 둘러싼 질문이 되었다.

하녀와 형사

보모 엘리자베스 고프는 아이 방에서 함께 잤으면서도 아이가 끌려가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말해 의심을 받았다. 지역 경찰은 그를 체포했다가 재판에 넘길 만한 증거가 부족해 풀어 주었다. 희생자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 어떻게 증거가 나오기 전에 혐의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수사였다.

스코틀랜드야드는 조너선 ‘잭’ 위치를 파견했다. 7월에 도착한 그는 범행 당시 열여섯 살이던 콘스턴스에게 눈을 돌렸다. 사라진 잠옷 한 벌도 그가 주목한 단서였다. 평범한 빨랫감이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일상적인 옷이 누군가와 비범한 범행을 연결할지도 몰랐다.

문제는 그 옷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피가 묻었을 것이라는 가설과 실제 옷을 찾아 검사한 결과는 다르다. 위치는 콘스턴스를 체포했지만 1860년에는 유죄 판결을 얻지 못했다. 그 자신도 비판을 받았다. 점잖은 집안의 딸이 용의자일 리 없다는 통념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는 대중이 미스터리로 받아들일 재료가 모두 있었지만 해답은 없었다. 집안 사정을 안다는 사실은 하녀에게도, 가족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창문은 외부 침입의 흔적일 수도, 그렇게 보이게 하려는 연출일 수도 있었다. 증인이 본 것과 수사관이나 독자가 ‘당연히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분리해야 했다.

책상 앞에서 수사에 뛰어든 디킨스

그의 편지는 필라델피아 자유도서관에 보존돼 있다. 디킨스는 아버지와 보모가 함께 있는 모습을 아이가 보았고, 비밀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두 사람이 아이를 죽였다고 추측했다. 이는 소설가의 주장이다. 편지는 디킨스가 무엇을 믿었는지 보여 줄 뿐, 그가 묘사한 만남이나 살인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 확신 자체가 사건의 역사다. 인물의 동기를 능숙하게 만드는 작가는 손에 쥔 세부 사항을 그럴듯한 순서로 배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해석이었다. 편지는 사건이 지역 보도를 넘어 퍼졌다는 사실도 말해 준다. 디킨스는 해외의 친구도 범죄를 알고 그 해결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훗날 추리소설은 이런 단서에 다른 질서를 부여했다. 윌키 콜린스 협회는 혐의를 낳는 옷을 비롯해 이 사건과 The Moonstone의 연결점을 지적한다. 1868년에 나온 소설은 범죄의 문학적 후일담에 속한다. 로드 힐 사건이 수사나 추리문학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가정 내부의 의심을 서술하는 어휘를 풍부하게 했다.

사건을 다시 연 자백

살인으로부터 5년이 지난 1865년, 콘스턴스가 자백했다. 그는 그 무렵 브라이턴의 세인트메리스 홈과 성공회 성직자 아서 와그너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진술에서는 혼자 범행했다고 주장했다. 자백은 절차를 바꾸었고 종교적 비밀, 정보 공개, 법원의 권한에 관한 질문을 불러왔다.

1865년 5월 9일 그 질문들이 하원에 제기되었다. 월리 의원은 고해성사의 비밀 아래 알게 되었다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문제를 따졌다. 내무장관 조지 그레이 경은 치안판사들이 피고인을 재판에 회부할 충분한 증거를 받았으며, 중요한 질문에 답하기를 거부하는 문제는 재판장이 판단할 것이라고 답했다.

영국 의회 회의록인 핸서드에는 이 문답이 남아 있다. 당시 논란의 증거이지 살인에 관한 모든 세부 사항이 독립적으로 입증됐다는 선언은 아니다. 논의는 아이 방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로 옮겨 갔다. 형사 절차가 답을 요구할 때 누가 비밀을 지킬 수 있는가?

콘스턴스는 1865년 7월 유죄를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형은 종신 노역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는 결국 20년을 복역하고 1885년에 석방되었다. 자백은 위치의 명예를 훼손했던 사건에 법적 결말을 주었지만, 그날 밤의 일을 완전하고 독립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까지 남기지는 못했다.

판결과 남은 질문

유죄 판결과 사건의 재구성은 구별해야 한다. 콘스턴스는 혼자 행동했다고 말했다. 뒤의 저술가들은 자백의 일부를 의심하며 다른 사람의 개입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것은 누가 주장하는지 밝혀야 하는 가설이다.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친척이나 사용인을 입증된 살인범으로 써서는 안 된다.

갈라진 가족 안의 복수가 흔히 동기로 제시된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명사전은 그 동기를 ‘주장된 것’으로, 자백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묘사한다. 이는 역사적 불확실성을 기록한 표현이지 판결을 뒤집은 것이 아니다. 남은 자료로는 당사자의 속마음을 단정하는 것보다 법적 절차를 신중히 설명하는 편이 더 확실하다.

콘스턴스의 삶은 빅토리아 시대의 스캔들 이후에도 길게 이어졌다. 1886년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서 루스 에밀리 케이라는 이름을 쓰고 간호사로 일했다. 1944년 4월 10일 시드니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의 삶이 아이의 죽음을 지우거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세부 사항을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를 법정 문에서 끝내면 보이지 않는 긴 세월을 드러낸다.

디킨스의 편지는 끝에 남길 만한 자료다. 그의 설명에는 등장인물과 기회, 동기가 있었고 그는 경찰이 그것을 뒤집지 못할 것이라 믿었다. 로드 힐 사건이 오래도록 관심을 끄는 이유 중 하나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와 증명된 이야기 사이의 거리다. 살인에는 법적 결론이 났다. 외부 사람들이 빈칸을 얼마나 자신 있게 채웠는지도 사건 역사의 한 부분이 되었다.

출처: 로드 교구 의회 사건 기록, 1861년 2월 1일 디킨스의 편지, 1865년 5월 9일 핸서드, 오스트레일리아 인명사전, 윌키 콜린스 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