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 10월 16일 자정이 되기 전, 존 브라운의 부하들은 이미 무기고 문을 부수고 있었다. 버지니아주 하퍼스페리의 다리와 연방 무기 공장을 장악한 뒤였다. 브라운은 인근 농장의 노예들이 합류하리라 기대했다. 날이 밝을 무렵, 지연된 열차의 이유를 알아보려던 자유인 흑인 철도 노동자가 치명상을 입었다.

습격은 이틀도 채 이어지지 않았다. 군사 작전은 실패했지만, 그 사건이 드러낸 논쟁은 오래 남았다. 브라운은 무기고 점거를 노예제에 맞선 무장 운동으로 바꾸려 했다. 하퍼스페리는 저항의 의미와 자유를 대변할 자격, 연방이 갈등을 억누를 수 있는지를 둘러싼 전국적 논쟁의 무대가 됐다.

캔자스의 폭력이 빚은 계획

브라운은 1800년 코네티컷에서 태어났다. 1850년대에는 노예제를 도덕적 범죄로 여기며 평화적 정치만으로는 끝낼 수 없다고 믿는 폐지론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노예제가 허용될지를 두고 다투던 캔자스에서도 폭력에 가담했다. 그의 삶에서 신념과 무력은 이미 얽혀 있었다.

1856년 5월 브라운이 이끈 무리는 포타와토미 크리크 인근에서 노예제를 지지하던 정착민 다섯 명을 살해했다. 노예제 반대 공동체가 공격받은 뒤 벌어진 일이지만, 살인은 브라운이 선택한 행동이기도 했다. 대의가 희생자들을 지워주지는 않는다. 하퍼스페리에서 그의 목적보다 그 목적을 추구한 폭력이 덜 기억된 이유를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새 계획은 더 크고 실현 가능성은 낮았다. 연방 무기고에서 총기를 확보하고, 노예들을 무장 운동에 끌어들인 뒤 산악 지대로 물러난다는 구상이었다. 봉기가 시작되면 더 많은 이들이 합류하리라 브라운은 믿었다. 북부의 폐지론자들, 훗날 ‘시크릿 식스’로 불린 이들이 자금을 댔다. 그렇다고 이 습격이 공화당의 작전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브라운을 알았던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계획을 거부했다. 하퍼스페리 공격은 함정이 될 것이라 보고 동참하지 않았다. 더글러스가 브라운에게 소개한, 노예 상태에서 탈출한 실즈 그린은 반대로 합류를 택했다. 노예제 반대가 브라운의 전략에 대한 동의를 뜻하지는 않았다. 흑인 참가자들도 각자 판단해 선택했다.

마을이 전장이 된 밤

브라운은 아이작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메릴랜드의 케네디 농장에서 작전을 준비했다. 10월 16일 밤, 부하들은 하퍼스페리에 들어가 무기고와 다리를 점거하고 주민 몇 명을 인질로 잡았다. 인근 농장에서는 노예들을 풀어주었다. 무기는 손에 넣었지만, 브라운이 기대했던 더 큰 규모의 합류는 없었다.

자유인 흑인 철도 노동자 헤이워드 셰퍼드는 멈춰 선 열차의 지연 이유를 알아보려 다가갔다. 습격대가 그를 쏘았고, 그는 다음 날 아침 숨졌다. 그의 죽음은 해방자와 억압자라는 단순한 구도를 흔든다. 폐지론자들이 지키겠다고 나설 수도 있었던 자유인이 습격의 첫 사망자가 됐다.

날이 밝자 주민과 민병대가 모였다. 총격으로 주민과 습격대원이 숨졌고, 브라운의 부하들은 마을 통제권을 잃고 인질들과 함께 작은 기관실 건물로 밀려났다. 전신과 신문은 노예 반란 소식을 전했지만, 브라운이 기대한 대규모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은 미 해병대를 보냈다. 육군 장교 로버트 E. 리가 동행해 작전을 지휘했다. 10월 18일 아침 해병대는 건물에 진입해 습격대원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고 브라운을 체포했다. 1859년의 리는 미국에 복무하는 장교였다. 그 공격을 남부연합군의 작전이라 부르면 나중에 시작된 전쟁을 과거로 가져오게 된다.

실패한 습격의 법정 기록

중상을 입은 브라운은 법정에 섰다. 버지니아에서 재판은 10월 27일 시작해 닷새 동안 진행됐다. 그는 살인, 노예 반란을 선동하려는 공모, 버지니아주에 대한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1월 2일 사형이 선고됐고, 1859년 12월 2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브라운은 법정과 편지에서 자유를 빼앗긴 이들을 돕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많은 폐지론자는 그 신념을 기억했지만, 다른 이들은 폭력을 비판하거나 더 큰 전쟁을 우려했다. 처형 전 그의 태도는 이야기의 일부가 됐다. 그렇다고 작전이 성공한 것도, 그가 던진 도덕적 질문이 해결된 것도 아니다.

탈출한 흑인 참가자 중 한 명인 오즈번 페리 앤더슨은 1861년 A Voice from Harper’s Ferry를 출간했다. 다른 이들이 사건을 대신 말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책은 참가자의 시각을 남겼다. 앤더슨은 원정을 옹호하고 흑인 참여에 관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기록은 증언이면서 동시에 논쟁이다.

해병대가 기관실 건물에 진입하는 모습. 목판화, 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1859년 10월 29일. 미국 의회도서관. 퍼블릭 도메인.
해병대가 기관실 건물에 진입하는 모습. 목판화, 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 1859년 10월 29일. 미국 의회도서관. 퍼블릭 도메인. · 출처

정치권의 반응 역시 엇갈렸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0년 2월 쿠퍼 유니언 연설에서 공화당을 브라운의 습격과 연결하려는 시도를 거부했다. 그는 노예제의 확대에는 반대했지만, 그 정치적 입장과 무장 봉기 시도를 구분했다. 노예제 반대 정치, 폐지론, 브라운의 방식은 맞닿아 있었으나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퍼스페리는 노예제 갈등이 이미 벌려 놓은 균열을 더 깊게 했다. 많은 노예 소유자에게 반란의 공포는 현실적인 위협이 됐다. 일부 폐지론자에게 브라운의 처형은 패배한 지휘관을 순교자로 만들었다. 습격은 지역 간 불신을 키웠지만 남북전쟁을 단독으로 일으키지는 않았다. 선거와 분리 독립, 오랜 정치 위기에는 각자의 역사가 있었다.

건물과 남겨진 질문

기관실 건물은 습격에서 살아남아 존 브라운의 요새로 불리게 됐다. 1891년 해체돼 시카고로 옮겨졌고, 1895년 하퍼스페리 인근에 다시 세워졌다. 1909년에는 스토러 칼리지로, 1968년에는 국립공원관리청에 의해 구시가지로 돌아왔다. 현재 위치는 원래 자리에서 약 46미터 떨어져 있다.

해병대가 문을 부수면서 습격은 끝났다. 그러나 그 사건이 드러낸 질문은 남았다. 자유를 내세워 세워진 나라가 노예로 붙잡아 둔 사람들에게 무엇을 빚졌으며, 어떤 저항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1859년 브라운은 무기로 답했다. 그의 패배는 질문을 닫지 못했고, 답을 미룬 대가를 외면하기 어렵게 했다.

출처: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존 브라운의 습격,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존 브라운 요새,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존 브라운을 돌아보다, 오즈번 P. 앤더슨: A Voice from Harper’s Ferry, 에이브러햄 링컨: 쿠퍼 유니언 연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