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스팅스로 이어진 과정은 한 왕의 죽음과 왕위 계승 분쟁, 고된 행군에서 시작됐다. 참회왕 에드워드가 1066년 1월 자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여러 인물이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했다. 해럴드 고드윈슨이 왕으로 즉위했지만,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왕위를 약속했고 해럴드도 그 권리를 지지하겠다고 맹세했다고 주장했다. 이 약속들의 증거에는 논란이 있으며, 중세 연대기 저자들도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에서 기록했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이 군대를 모았고, 세 번째 왕위 주장자인 노르웨이 왕 하랄 하르드라다가 가세하면서 계승 분쟁이 일 년에 걸친 전쟁으로 번졌다는 사실이다.
9월 25일, 해럴드군은 잉글랜드 북부의 스탬퍼드브리지에서 하르드라다를 물리쳤다. 사흘 뒤 윌리엄이 남부에 상륙했다. 해럴드는 군대를 수백 킬로미터 행군시킨 뒤 10월 14일 이스트서식스의 오늘날 배틀이라는 마을 근처 고지에서 노르만군과 맞섰다. 헤이스팅스 전투로 알려진 싸움은 헤이스팅스 시내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다. 장소와 참전 군대, 그날의 결과는 전투의 여러 세부 사항보다 더 잘 입증돼 있다.
하나의 왕위와 세 명의 주장자
에드워드의 죽음이 남긴 것은 정치적 공백이었으며, 명확한 계승 규칙이 아니었다. 해럴드는 군사력을 갖춘 잉글랜드 귀족으로, 왕국의 유력 인사들이 참여한 평의회의 지지를 받았다. 윌리엄은 에드워드의 약속과 해럴드가 했다고 주장되는 맹세를 근거로 삼았다. 하랄 하르드라다는 이전 잉글랜드 왕과 관련된 스칸디나비아의 협약을 내세웠다. 정복 이후 제작을 의뢰한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해럴드가 윌리엄에게 맹세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장면은 승자들이 구성한 그림 서사의 일부다. 무엇을 어떤 상황에서 약속했는지에 관한 모든 의문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스탬퍼드브리지에서 거둔 해럴드의 승리에는 대가가 따랐다. 노르만군이 상륙하자 그의 군대는 급히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반면 윌리엄군은 바다로 보급을 받았고 진지를 마련할 시간도 있었다. 잉글랜드군은 고지에 모여 병사들이 밀집해 방패를 나란히 세우는 방어 대형인 ‘방패벽’을 형성했다. 노르만군에는 보병과 궁수, 기병이 있었다. 역사유산 보존 기관인 잉글리시 헤리티지와 히스토릭 잉글랜드는 중세 기록과 지형을 토대로 전투를 재구성한다. 그러나 당시 자료 중 분 단위로 과정을 기록한 것은 없다. 정확한 사상자 수와 일부 전술적 세부 사항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전장에서 벌어진 일
전투는 하루의 상당 부분 동안 계속됐다. 잉글랜드군은 고지의 진지를 지켰고, 노르만군은 돌파하기 어려웠다. 기록에는 노르만군의 후퇴를 따라 잉글랜드 전사들이 방패벽을 벗어났다가 반격을 당한 과정이 나온다. 역사가들은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 의도한 전술이었고, 어느 정도는 압박에 밀린 후퇴였는지 논의한다. 태피스트리는 군의 작전 일지가 아니다. 후대 연대기 저자들에게는 승리를 신의 뜻으로 설명하거나 패한 왕에게 책임을 돌릴 이유가 있었다.
결정적인 전환은 해럴드가 전사하고 잉글랜드군의 전열이 무너졌을 때 찾아왔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는 ‘여기서 해럴드 왕이 죽임을 당했다’라는 뜻의 문구 옆에 인물이 그려져 있다. 학자들은 눈에 화살을 맞은 인물이 해럴드인지 여부를 포함해 그림의 세부 내용을 논쟁해 왔다. 문구와 전체 기록에서 가장 확실하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해럴드가 전투 중 사망했고 윌리엄이 승리했으며, 왕을 직접 둘러싼 군대의 조직적 저항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태피스트리는 중요한 사료지만, 사진처럼 읽으면 정치적 서사를 중립적인 목격 증거로 오해하게 된다.
해가 졌다고 윌리엄이 잉글랜드 전역의 확고한 통치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는 런던으로 진격하며 저항에 부딪혔고, 1066년 크리스마스에 대관식을 치렀다. 반란은 계속됐다. 정복에는 배틀에서의 승리 이상이 필요했다. 군사 점령과 잉글랜드 지주들의 토지 박탈, 새로운 성, 행정 조사가 뒤따랐다. 1086년에 편찬한 둠스데이 북은 잉글랜드의 넓은 지역에 걸쳐 토지와 부담 의무를 기록한 조사 대장이다. 이 자료는 권력 구조가 얼마나 철저하게 바뀌었는지 보여준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 변화
노르만인의 권력 장악은 일반 주민의 언어보다 통치자를 더 빨리 바꿨다. 프랑스어는 왕실과 귀족 상당수의 언어가 됐고, 라틴어는 교회와 행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유지했다. 주민 대부분은 당시 영어의 형태인 고대 영어를 계속 사용했다. 수 세기에 걸친 언어 간 접촉은 영어의 어휘와 문법을 변화시켰다. 헤이스팅스 직후 프랑스어가 영어를 곧바로 대체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언어 변화는 점진적이었고 진행 속도도 균일하지 않았다.
반면 토지 소유는 급격히 바뀌었다. 윌리엄은 추종자들에게 영지를 나눠주며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연결하는 새로운 지배층을 만들었다. 성은 점령을 눈에 보이게 했고, 지역 반란은 그 지배에 대한 저항을 보여줬다. 정복은 잉글랜드를 유럽 대륙의 정치에도 더 긴밀하게 연결했다. 윌리엄이 해협 양쪽에 보유한 영지는 후대 잉글랜드 왕들을 프랑스 통치자들과의 분쟁에 끌어들이게 된다. 다만 이러한 영향은 1066년을 훨씬 넘어 이어졌다.
사료 자체도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드러낸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전투를 간략하게 기록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윌리엄에게 우호적인 더 긴 그림 이야기를 전한다. 후대 역사서들은 왕권과 신의 섭리에 대한 각자의 관점으로 정복을 해석했다. 고고학과 경관 연구는 전장에 관한 증거를 더하지만, 논쟁적인 모든 장면을 확실한 사실로 바꾸지는 못한다. 신중한 서술은 사료들이 공통으로 전하는 내용과 각자가 제시하는 설명을 구별한다.
1066년이 기억되는 이유
헤이스팅스는 왕의 목숨을 앗아가고 새로운 지배 질서를 가능하게 했기에 정복을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어느 오후에 현대 잉글랜드가 만들어졌다는 단순한 주장에 달려 있지 않다. 왕위 계승 위기와 남북의 군사 작전, 노르만 점령과 수십 년간의 행정 변화가 모두 같은 역사의 일부다. 군사적으로 전투는 결정적이었지만, 사회적 결과는 그 뒤에 형성됐다.
윌리엄이 현장 근처에 세운 배틀 수도원은 오랫동안 남을 기념물과 정치적 기억을 경관에 새겼다. 수도원의 전승에 따르면 해럴드가 쓰러진 자리에 세워졌지만, 정확한 지점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마을과 전장, 유적은 사건뿐 아니라 이를 해석하려 했던 후대의 노력도 보존한다. 익숙한 연도인 1066년은 국가가 순식간에 새로 태어난 때를 뜻하지 않는다. 다투던 왕위가 무력으로 결정되고 잉글랜드의 통치자와 토지 소유,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가 바뀌기 시작한 순간을 가리킨다.
출처: 잉글리시 헤리티지: 전투 과정, 히스토릭 잉글랜드: 전장 등록 기록, 영국도서관: 바이외 태피스트리, 잉글리시 헤리티지: 전투 장소, 앵글로색슨 연대기: 1066년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