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건너편의 라카바냐

1959년 초 몇 주 동안 아바나의 옛 요새 라카바냐는 혁명의 핵심 약속이 실행되는 장소가 됐다.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보안기관에서 일했던 이들이 살인과 고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약속이었다. 동시에 새 권력이 이른바 ‘혁명적 정의’를 어디까지 밀어붙일지 시험하는 곳이기도 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요새의 지휘관으로 임명됐다.

감옥은 물 건너 아바나 중심부를 마주 보고 있었다. 사형수들은 동트기 전에 요새의 마른 해자로 끌려갔다. 1959년 《타임》의 보도에는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감방을 나서는 수감자들, 눈가리개를 거부하거나 직접 총살 명령을 내리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 기사는 재판 기록이 아니며 당시 잡지의 문체를 반영한다. 그래도 재판과 처형이 얼마나 빠르게 공개적인 구경거리가 됐는지 보여준다.

최고 정치 권력은 피델 카스트로에게 있었다. 게바라는 국가원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직접적이었다. 그는 요새를 지휘하고, 자신이 임명한 감사관을 통해 재판 체계를 조직했으며, 사형 선고를 검토하고 처형을 옹호했다. 1964년 유엔 총회에서 그는 쿠바가 “필요한 한” 처형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숫자가 보여주는 것과 말해주지 않는 것

게바라가 라카바냐를 지휘할 때 그곳에서 처형된 사람의 수에 대해 합의된 단일 수치는 없다. 사건 기록이 없거나 공개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무엇을 세는가의 차이도 있다. 서명된 사형 선고인지, 기각된 항소인지, 체가 지휘관으로 있던 동안 집행된 처형인지, 아니면 더 긴 기간 요새에서 발생한 사망 전체인지에 따라 숫자가 달라진다.

유용한 자료 하나는 라카바냐 감사관으로 임명된 변호사 미겔 앙헬 두케 데 에스트라다의 증언이다. 그는 2014년 쿠바 노동조합 신문 《트라바하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1959년 2월 1일부터 5월 25일까지 요새에서 군사재판 346건이 열리고 사형 선고 77건이 내려졌다고 말했다. 상급 군사위원회가 51건을 확정하고 26건을 변경했다고도 했다. 그는 대법원으로 넘어간 미결 사건 14건도 언급했지만, 그 건들이 77건과 어떤 관계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77건 중 실제 집행된 사형이 몇 건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같은 감사관은 게바라가 2월에 일곱 재판위원회를 주재하고 13건을 검토했으며, 한 형을 감형하고 나머지는 확정했다고 말했다. 두케 데 에스트라다는 재판이 합법적이었고 피고인에게 모든 절차적 권리가 보장됐다고 주장했다. 이는 제도 안에서 일한 관리자가 수십 년 뒤 내놓은 공식 설명이다. 정부의 수치와 방어 논리를 보여주는 자료이지만 독립적인 감사는 아니다.

존 리 앤더슨의 전기 《Che Guevara: A Revolutionary Life》는 게바라 지휘 초기 약 100일 동안 55명이 처형됐다고 집계한다. 이 숫자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서평에도 소개됐다. 인권 기록 프로젝트인 쿠바 아카이브의 데이터베이스는 현재 1959년 한 해 라카바냐에서 발생한 처형 75건을 올려두고 있다. 공식 집계가 아니라 자료를 모아 재구성한 사례 목록이며, 기간과 책임 귀속 방식이 다르다. 서로 더하거나 같은 것을 측정한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기록에서 가장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더 좁다. 게바라가 요새를 지휘하는 동안 수십 건의 사형 선고가 처리됐고, 그가 직접 선고를 검토하고 확정했다. 공개된 자료만으로는 그에게 귀속할 수 있는 처형의 최종 합계를 확정할 수 없다.

요새 안의 재판

문제는 사망자가 몇 명인지뿐 아니라 재판이 어떤 방식으로 결론에 이르렀는가이다. 국제법률가위원회가 1962년에 낸 보고서에는 쿠바인 변호인의 증언이 실려 있다. 그는 한 번은 기소장을 검토할 시간이 5분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사건에서는 기소 내용에 없던 살인 혐의를 증인이 법정에서 제기한 뒤 피고인이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했다. 변호인은 유리한 증인을 부를 수 없었고 항소도 기각됐다는 증언이다.

그 변호인은 또 검찰과 재판위원들이 그날 밤 여러 사형 선고를 내려야 게바라 당시 라카바냐 지휘관의 비판에 답할 수 있다는 대화를 자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는 면담에 바탕을 둔 인권 조사이지 체에 대한 형사 판결이 아니며, 해당 증언에서 변호인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 증언만으로 모든 사건의 진행을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판에 대한 압력을 둘러싼 당시의 중대한 주장을 기록하고, 감사관이 훗날 내세운 절차 보장과 거리가 먼 과정을 전한다.

헤수스 소사 블랑코의 재판은 절차가 왜 대중적 구경거리가 됐는지 보여준다. 바티스타 군의 대령이었던 그는 쿠바 동부에서 민간인, 그중에서도 농민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59년 1월 첫 재판은 라카바냐가 아니라 아바나 스포츠 궁전에서 군중 앞에 열렸다. 《타임》은 검찰이 그에게 살인 56건을 적용했고, 재판 직전 선임된 국선 변호인이 사형을 소급 적용할 수 없으며 소사가 군인으로서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재판부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고 뒤이어 두 번째 절차가 열렸다. 소사는 2월 18일 라카바냐에서 총살됐다. 그에 대한 혐의는 중대했다. 그러나 공개 법정의 무대, 군중의 압력, 달라진 재판 절차는 별도의 질문을 낳는다. 사형을 결정하기 전에 증거와 법을 공정하게 심리했는가?

라카바냐에는 1959년 10월 체포된 전직 반군 지휘관 우베르 마토스도 수감됐다. 그는 정부가 공산주의 방향으로 나아간다며 사임했다. 그의 재판은 12월에 열렸고 게바라가 요새를 떠난 지 여러 달 뒤였다. 카스트로는 처형 대신 20년형을 택했고 마토스는 형기를 모두 살았다. 이 재판을 체의 결정으로 돌릴 수는 없다. 다만 승리한 지도부가 자기 진영 안의 반대 의견을 어떻게 처벌했는지는 보여준다.

게바라 자신의 기록에 남은 농민의 죽음

라카바냐가 게바라가 참여한 첫 처형은 아니었다. 그는 게릴라전 회고록에서 1957년 2월 에우티미오 게라가 죽은 일을 서술했다. 농민이었던 게라는 반군에 가담한 뒤 바티스타 군에 반군의 위치를 알려줬다고 자백했다. 게바라는 포로가 죽여 달라고 요청한 뒤 자신이 .32구경 권총으로 게라의 머리를 쐈다고 썼다. 이는 체의 진술이지 독립적인 조사의 결과는 아니다. 그래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직접 총을 쐈다고 인정한 기록이다.

게라의 배신은 게릴라와 그들을 숨겨준 가족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반군이 그를 위협으로 본 이유는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기록된 재판 없이 이뤄진 처형을 사법적 선고로 바꾸지는 못한다. 게바라의 글은 ‘숙청’이라는 말에 가려지기 쉬운 구체적인 사람들을 드러낸다. 한 농민, 붙잡힌 옛 동료, 아이들을 돌봐 달라는 부탁, 그리고 훗날 장관이 될 사람이 쏜 총알이다.

쿠바에서 콩고와 볼리비아로

체의 권력은 쿠바 재판으로 끝나지 않았다. 1965년 그는 현지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쿠바 전투원들을 이끌고 콩고 동부로 들어갔다. 《가디언》이 발췌 공개한 그의 일기에는 실패한 작전, 보급난, 현지 운동 조직에 대한 그의 가혹한 평가가 담겼다. 카스트로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값비싼 실수를 낳고 있다고 불평했다. 쿠바군이 철수할 때 현지 전투원 가운데 일부만 함께 데려가기로 했고, 나머지와 민간인은 남겨졌다고 게바라는 적었다. 일기는 철수와 현지 동맹의 방치를 보여주지만, 그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현지 운동이 감당할 수 없었던 군사 모델을 수출하려 한 시도의 대가를 실패가 드러낸다.

볼리비아에서 그는 다시 시도했다. 1966년 입국해 게릴라대를 조직하고 볼리비아군과 싸웠다. 농촌 주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 달랐으며, 게바라 본인도 볼리비아 일기에 그 약점을 적었다. 볼리비아군은 1967년 10월 8일 그를 붙잡았다. 공개된 미국 정부 문서는 그가 다음 날 재판 없이 처형됐음을 확인한다. 그는 1967년 삼대륙회의에 보낸 메시지에서 “두 개, 세 개, 수많은 베트남”을 만들자고 촉구했다.

기록이 허용하는 판단

포스터 속 체와 문서 속 체를, 증거가 부족한 척한다고 해서 화해시킬 수는 없다. 그는 새 쿠바 정부의 핵심 지도자였고 라카바냐를 지휘했으며 사형 사건을 검토하고 공개적으로 처형을 옹호했다. 자신의 회고록에는 게릴라전 중 농민을 죽인 일이 나온다. 이후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무장 작전을 이끌었고, 그 실패의 대가는 현지 동맹과 전투원들이 치렀다.

라카바냐의 정확한 사망자 수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불확실한 것은 집계와 공개된 사건 기록이지 게바라의 정치적 입장이 아니다. 그는 폭력 기구를 물려받고 거리를 둔 것이 아니었다. 권한을 행사해 그 기구를 움직였고 혁명에 필요하다고 옹호했다.

출처: 국제법률가위원회, Cuba and the Rule of Law, Trabajadores, 라카바냐 감사관 인터뷰, 유엔, 1964년 게바라 총회 연설, 게바라, Reminiscences of the Cuban Revolutionary War, The Guardian, 콩고 일기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