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여신상 안에 놓인 엠마 라자루스의 시가 새겨진 청동판은 1903년에 설치됐다. 동상 제막식이 열린 지 17년이 지난 뒤였다. 오늘날 동상과 깊이 연결된 ‘새로 오는 사람을 맞이한다’는 뜻은 처음부터 동상의 일부가 아니었다. 구리로 만든 형상과 시는 서로 다른 역사를 거쳐 훗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하나로 묶였다.

2026년 10월 28일은 제막 140주년이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세부를 놓치기 쉬운 기념물을 다시 볼 기회다. 그 기원에는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의 희망과 미국의 독립, 노예제 폐지를 향한 생각이 함께 있다. 건설에는 대서양 양편의 기술과 모금이 필요했다. 시와 이주의 역사가 더해지면서 새로 도착하는 이들을 맞이하는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커졌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넨 제안

동상을 관리하는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은 구상의 출발점을 1865년 에두아르 드 라불레에게서 찾는다. 프랑스의 정치사상가이자 헌법학자, 노예제 폐지론자인 그는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부 연방을 지지했다. 미국을 기리는 일은 프랑스 국내의 주장에도 힘을 실을 수 있었다. 자유를 공개적으로 기념하는 일은 자국에서 민주주의 정부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됐다.

조각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그 생각에 형태를 주었다. 그는 1871년 미국을 방문해 뉴욕항의 베들로스섬, 지금의 리버티섬을 자리로 골랐다. 항구로 들어오는 배에서 동상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공식 명칭인 ‘세계를 밝히는 자유’에는 동상이 서 있는 나라 바깥까지 빛을 보내겠다는 뜻이 담겼다.

이 계획은 프랑스와 미국의 우정을 물질적인 형태로 만들기도 했다. 프랑스가 동상 제작비를, 미국이 받침대 건설비를 맡았다. ‘선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만 이 역할 분담은 드러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조각상이 완성돼도 미국에서 받침대를 마련하지 않으면 뉴욕항에 세울 수 없었다.

여러 조각으로 바다를 건넌 동상

뉴욕에서 완성된 동상을 보기 전부터 사람들은 그 일부를 보았다. 횃불을 든 팔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박람회에 전시됐고, 머리와 어깨는 1878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등장했다. 거대한 조각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사업을 눈에 보이게 했다. 몸통과 떨어진 머리, 전체보다 먼저 나타난 팔은 우리가 익히 아는 동상과는 다른 모습이다.

바르톨디가 만든 얇은 구리 외피에는 이를 지탱할 구조물이 필요했다. 기술자 외젠 비올레르뒤크가 1879년 사망한 뒤 귀스타브 에펠이 구조 설계를 이어받았다. 얇은 구리 외피를 내부 철골로 지탱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쪽 받침대는 리처드 모리스 헌트가 설계했다. 동상의 모습을 만드는 일과 바람이 센 항구에서 안정적으로 서 있게 하는 일은 서로 다른 전문성을 요구했다.

파리에서 조립 중인 자유의 여신상, 1881~1883년. Albert Fernique. 미국 의회도서관, LC-DIG-ds-14922. 퍼블릭 도메인.
파리에서 조립 중인 자유의 여신상, 1881~1883년. Albert Fernique. 미국 의회도서관, LC-DIG-ds-14922. 퍼블릭 도메인. · 출처

완성된 동상은 1884년 7월 4일 파리에서 미국 공사에게 전달된 뒤 운송을 위해 해체됐다. 부품을 실은 프랑스 해군 함선 이세르호는 1885년 6월 17일 뉴욕에 도착했다. 하지만 받침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도착을 축하해도 동상을 세울 바닥이 없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조각들은 그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조지프 퓰리처의 신문 《뉴욕 월드》는 1885년 대중 모금 운동을 벌여 자금난을 푸는 데 힘을 보탰다. 공사가 재개됐고 받침대는 이듬해 완성됐다. 동상을 다시 조립하면서 대서양을 가로지른 협력도 실물로 마무리됐다. 익숙한 윤곽 뒤에는 위원회, 기부자, 장인, 기술자, 건설 노동자가 있었다. 국가 기념물의 역사를 한 사람의 이름으로만 기억하면 쉽게 지워지는 이들이다.

구리 동상이 보여 주는 다른 뜻

동상이 들고 있는 석판에는 1776년 7월 4일이 로마 숫자로 적혀 있다. 횃불은 계몽의 빛을 상징한다. 발치에는 끊어진 족쇄와 사슬이 놓여 있고, 일부는 옷자락에 가려져 있다. 이 세부는 미국의 독립을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자유와 연결한다. 사슬이 특히 눈여겨볼 만한 까닭은 얼굴과 횃불만 담은 수많은 사진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은 동상의 기원을 노예제 폐지 운동과 분명히 연결하면서도 그 상징의 한계를 기록한다. 노예제가 끝났다고 인종 차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제막식 이후 흑인 언론은 동상을 무조건 찬양하는 설명에 이의를 제기했다. 자유의 형상은 여전히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에 비춰 볼 수도 있었다.

그 간극은 제막식에서도 드러났다.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1886년 10월 28일 동상을 공식 인수했다. 뉴욕주 여성참정권협회는 남성 동행자가 없는 여성들의 행사 입장을 허락받지 못하자 배를 빌려 물 위에서 행사를 지켜봤다. 여성의 모습을 한 자유의 상징이, 그 여성들을 들이지 않은 행사에서 공개된 것이다. 상징으로서의 자유와 실제 정치적 권리 사이의 거리가 뚜렷해지는 순간이었다.

동상이 말을 거는 대상을 바꾼 시

라자루스는 1883년 11월 2일 받침대 건설 기금을 모으는 전시회를 위해 「새로운 거상」을 썼다. 시 속 목소리는 고대 정복자의 위엄에서 눈을 돌려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동상을 ‘망명자들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안정된 집 없이 도착하는 이들에게 기념물의 의미를 향하게 한다.

이 14행시는 제막 전에 쓰였지만, 그 글귀가 청동판에 새겨진 것은 1903년이다. 순서가 중요하다. 동상을 이민자를 맞이하는 상징으로 보는 해석에는 일찍부터 주창자가 있었으나, 실제 동상에 새겨진 것은 그보다 훨씬 나중이었다. 시는 이미 있는 조각상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목소리와 청중을 주고, 높이 든 불빛이 무엇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하게 했다.

엘리스섬의 연방 이민 심사 시설은 1892년 1월 1일 문을 열었다. 동상이 있는 섬과는 다른 곳이지만 두 장소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밀접하게 연결됐다. 한쪽에서는 연방 규정에 따라 입국 절차를 밟았고, 다른 쪽은 도착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가 됐다. 장소와 연대를 구별하면 그 연결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청동판에 새겨진 환영의 말은 문학적 표현이지 이민법이 아니다. 두 가지의 차이가 오히려 그 말의 지속적인 힘을 만든다. 이 말은 정책과 이민자의 실제 경험을 비춰 볼 수 있는 이상을 제시한다. 기념물에 새긴 시는 모든 도착자가 똑같은 환대를 받았다고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한 나라에 기대를 요구할 수 있다.

시간이 빚어낸 상징

익숙한 겉모습에도 변화의 기록이 남아 있다. 처음 갈색이던 구리는 산화되며 녹색 녹청을 띠게 됐다. 지금 높이 들린 횃불은 1986년에 교체한 것이고, 원래 횃불은 자유의 여신상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항구에서 보면 변하지 않은 표상처럼 보여도 유지 보수와 교체, 재료의 시간을 거쳐 왔다.

해석도 그렇게 쌓였다. 다만 뜻은 도구로 복원할 수 없다. 노예제 폐지의 구상, 석판에 적힌 독립의 날짜, 라자루스의 환영은 기념물 역사에서 서로 다른 줄기다. 함께 읽으면 공공 작품이 최초 제안자들이 다 헤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말을 걸면서, 동시에 그들의 뜻을 남길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140년이 지난 지금도, 한 장의 사진에 좀처럼 함께 담기지 않는 두 세부를 통해 동상을 읽을 수 있다. 발치의 끊어진 사슬과 받침대 안의 시다. 하나는 속박에서 벗어남을, 다른 하나는 살아갈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말을 나타낸다. 자유는 무엇에서 벗어났는가에만 달린 것이 아니다. 사회가 그 사람이 이후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가에도 달려 있다.

출처: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노예제 폐지,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건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 연혁, 엠마 라자루스: The New Colossus, 미국 의회도서관: 시와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