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 안첼로티가 초대를 받은 것은 유소년 경기 직후였다. 파르마에서 뛰던 그는 아직 열여섯이 되지 않았고 산베네데토의 살레시오회 시설에서 살았다. 구단 지인인 연장자 페드라네스키는 다음 날 아침 치타델라의 어떤 행사에 데려가겠다고 했다. 두 영화감독이 축구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수십 년 뒤 안첼로티는 기자 안드레아 스키안키에게 당시 그 이름들을 들어도 누군지 몰랐다고 말했다. 그래도 뛰겠다고 했다.
날짜는 일요일인 1975년 3월 16일이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서른네 번째 생일 행사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촬영 중인 두 영화의 제작진이 모였다. 그의 『1900년』, 이탈리아어 제목으로 Novecento, 그리고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이었다. 파르마 치타델라 구장에서 영화인들은 서로 맞서는 열한 명의 선수가 됐다. 51년 뒤 이 경기는 점수, 사진, 영상, 그리고 유난히 유명한 인물들이 얽힌 선수 선발 논쟁을 남겼다.
두 촬영장 사이의 생일
두 동료에게는 함께한 역사가 있었다. 1961년 베르톨루치는 대학을 그만두고 『아카토네』에서 파솔리니의 조수를 했다. 나이 많은 감독은 가족의 친구이자 로마 이웃이었고, 베르나르도의 아버지인 시인 아틸리오 베르톨루치는 그의 문학 활동을 지지했다. 1975년 옛 조수는 국제적으로 이름난 감독이 됐다. 관계에는 파솔리니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비판 같은 의견 차이도 있었다. 후대 서술은 배우 라우라 베티를 생일을 만남의 기회로 바꾸도록 도운 중개자로 꼽는다.
『1900년』은 거대한 작업이었다. 1976년 개봉한 완전판은 315분이며, 지주의 후계자 알프레도 베를링기에리와 농민의 아들 올모 달코의 우정을 20세기 전반의 격변 속에서 따라간다. 성인이 된 두 사람을 로버트 드 니로와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연기한다. 사회주의, 농업 노동, 파시즘, 해방이 관계를 바꾼다. 비토리오 스토라로의 촬영과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이 함께한 제작에서는 여러 달 함께 지낸 시간도 자체 전설의 일부가 됐다.

파솔리니 영화는 규모도 달랐고 세계는 훨씬 폐쇄적이었다. 사드 후작을 바탕으로 한 『살로』는 1944–45년 파시스트 통치 아래의 이탈리아 북부에 무대를 둔다. 권력자 네 명이 젊은이들을 가두고 모욕, 성폭력, 고문의 체계에 복종시킨다. 제목은 독일의 지원을 받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흔히 살로 공화국이라 부르는 정권을 가리킨다. 파솔리니는 절대권력의 행사를 공격하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그 가혹함은 상영 금지, 압수, 오랜 논란을 낳게 된다.
의상팀이 경기장에 나서다
두 영화 뒤에는 제작자 알베르토 그리말디가 있었지만 제작진의 작업 환경은 매우 달랐다. 후대 다큐멘터리 Centoventi contro Novecento를 위해 모은 증언에서 편집자 우고 데 로시는 소박한 『살로』와 부유한 이웃 제작진의 대비로 경쟁을 회상했다. 파솔리니의 절친 베티는 『1900년』에 출연했다. 경기는 직업적·개인적 유대를 교차시켰다. 자신의 영화 제작진이 그녀가 오랫동안 작품을 옹호하고 보존할 감독과 맞섰다.
『1900년』은 행사에 맞게 차려입고 왔다. 의상 디자이너 기트 마그리니가 노란 글씨가 있는 보라색 셔츠와 여러 색의 양말을 제공했다. 당시 보도는 공을 보는 상대를 현란한 양말이 혼란시킨다고 농담했다. 파솔리니 팀은 그가 응원하던 볼로냐의 빨강·파랑을 입었다. 대조는 안첼로티의 기억에도 남았다. 베르톨루치 유니폼은 지나치게 화려했고 상대가 더 우아해 보였다. 의상팀은 촬영장에 어울리는 축구 복장을 만들었다.
더 중요한 이점은 셔츠 안에 있었다. 『1900년』 주장인 음향기술자 데초 트라니는 훗날 상대 실력에 놀란 팀의 불안을 설명했다. 파르마 유소년 선수들 가운데 지원군을 찾아 영화 제작진인 것처럼 소개했다. 안첼로티도 그중 하나였다. 2021년 인터뷰에서 사용된 말은 attrezzista, 즉 소품과 장비를 담당하는 스태프였다. 그 가짜 기술자의 실제 역할은 유소년 중앙 공격수였다. 베르톨루치 팀은 축구 실력으로 선수를 모집했고 차이는 경기장에 드러나게 된다.
확실한 리플레이 없는 골
파솔리니는 뛰었고 베르톨루치는 옆에서 응원했다. 시인이자 감독인 파솔리니에게 축구는 프리울리에서 로마 외곽까지 평생 이어진 활동이었다. 축구 에세이에서는 패스와 집단 조직을 산문으로, 드리블과 골을 시로 다뤘다. 그날은 훗날 양발로 슈팅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 유소년 중앙 공격수도 상대했다. 안첼로티는 파솔리니가 속임수를 알아차렸지만 너무 뛰고 싶어 경기를 중단하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1900년』이 5–2로 이겼다. 그해 3월 『가제타 디 파르마』 보도는 사이키델릭한 양말 덕분이라며 농담했다. 영상 기록도 결과를 뒷받침하지만, 후대 회상은 점수를 덜 그럴듯한 수준으로 부풀렸다. 안첼로티는 스키안키에게 자신이 득점했다고 확인했다. 기뻐한 장면은 기억해도 공이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세리에 A와 이탈리아 대표팀을 꿈꾸던 소년의 즐거움은 남았지만 골의 세부는 사라졌다.
파솔리니가 일찍 떠난 이유는 덜 분명하다. 후대 목격자들은 지기 싫어하는 성격, 미심쩍은 지원 선수, 경기 중 거친 대우 등을 서로 다르게 강조했다. 분노의 모습은 기억마다 달라도 승리 의지는 공통이다. 지원 선수에 관한 의혹은 경기 뒤에도 남았다. 수십 년 후 영화인들이 사진을 다시 보며 낯선 얼굴 속 미래의 안첼로티를 찾을 때도 한 젊은 선수의 신원은 불확실했다.
생일 케이크와 사진
경기 후에는 트로피와 생일 케이크가 있었다. 클레어 페플로가 슈퍼 8로 촬영했고, 볼로냐 시네마테크는 이 영상을 Salò vs Novecento로 분류한다. 축구와 함께 케이크 축하 장면도 영상에 남았다. 『살로』의 스틸 사진가 데버라 비어 역시 모임을 촬영했다. 기록들은 경기를 참여자 기억 너머로 살아 있게 했고, 훗날 가장 유명한 선수 선발 논란을 해결할 얼굴들을 보존했다.
파솔리니는 같은 해 11월 2일 오스티아에서 살해됐다. 11월 22일 『살로』가 파리에서 처음 공개 상영됐을 때 베르톨루치와 베티는 검열에 반대하는 발언자에 속했다. 축구 경쟁은 점수보다 훨씬 큰 관계의 일부였다. 수십 년 후 알레산드로 실리타니와 알레산드로 디 누초가 2019년 소개된 다큐멘터리 Centoventi contro Novecento에서 경기를 돌아봤다. 조사는 뒤에 2023년 알리베르티 출판사의 책으로 이어졌다. 2019년 재구성 당시에도 파르마의 어린 선수 신원은 확인이 필요했다.
2021년 3월 19일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가 스키안키의 인터뷰를 실었다. 옛 사진을 본 안첼로티는 자신을 알아봤다. 그 소년이 자신이라며 사본을 부탁했다. 확인으로 외부 영입 의혹을 받은 선수의 이름은 밝혀졌지만 모든 불만과 엇갈리는 기억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1975년 3월 훗날의 축구 챔피언은 감독들의 위상을 모르고 일요일 경기에 나선 청소년이었다. 46년 뒤 제작진의 쉬는 날 사진은 자신의 출발점을 간직한 기념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