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4년 11월 26일,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이 세상을 떠난 날 페르난도는 마드리드에 왕위 계승 지침을 보냈다. 도시는 두 사람의 딸인 새 여왕 후아나를 위해 깃발을 올려야 했다. 같은 왕실 명령서는 이사벨의 유언에 따른 자신의 행정 관리·통치 권한도 명시했다. 딸이 왕위를 물려받고, 남편은 계속 국정을 이끌 생각이었다. 죽음을 알리는 문서가 동시에 권력의 배분을 정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거의 9년 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쓰고 있었다. 페르난도는 이 책에서 성공한 동시대 군주를 가장 인상적으로 그린 인물로 실명 등장한다. 아라곤의 왕이 이 책에 가장 큰 영감을 주었을까. 이미 지위를 굳혔으면서도 권위를 계속 넓혀 간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모델로 볼 근거는 충분하다. 다만 이는 증거에 대한 해석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영감에 순위를 매긴 적이 없으며, 책을 한 왕의 전기로 축소할 수도 없다.

스스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왕

가장 명확한 근거는 군주가 존경을 얻는 행동을 다룬 제XXI장에 있다. 마키아벨리는 아라곤의 페르난도를 꼽으며 거의 새로운 군주라고 부른다. 왕위는 세습했지만 성취를 통해 위상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관심사는 정치적 위대함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페르난도가 중요한 이유는 비교적 약한 지위를 기독교 군주들 사이의 이례적인 위신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계산으로 그라나다 정복을 설명한다. 전쟁이 카스티야 귀족들을 붙잡아 전역에 집중하게 하는 동안 왕은 그들에 대한 권위를 강화했다. 교회와 주민들의 자금이 군대를 유지했고, 긴 전쟁이 군사적 기반을 다졌다. 이러한 해석에서 대외 사업은 왕국 내부의 관계도 재편했다. 귀족들은 자기 군주에게 맞서기 더 어렵게 만드는 전쟁을 돕고 있었다.

장이 진행될수록 논의는 더 불편해진다. 마키아벨리는 종교적 언어를 강제, 재산 박탈, 팽창과 연결한다.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프랑스를 상대로 이어진 사업은 신민들을 기대와 관심 속에 붙잡아 반대 세력이 조직될 틈을 거의 주지 않는다. 그는 행동과 믿음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방식을 설명한다. 이 초상이 모든 원정에 하나의 숨은 목적이 있었다고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박해의 효과를 설명한다고 그 피해자들이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 초상의 중심에는 빠진 인물도 있다. 이사벨이다. 그라나다 정복과 왕실 통치의 확립은 공동 군주정의 성과였으며, 카스티야 여왕은 그 안에서 상당한 권한을 행사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통치 방식에 관심을 둔 남성에게 이 역사를 집중시킨다. 안토니오 가르가노의 마키아벨리·귀차르디니 속 페르난도 연구는 이 정치적 모델과 더 복잡한 역사적 기록의 관계를 살핀다. 또한 마키아벨리의 페르난도를 무조건적인 모범이 아닌 양면적인 인물로 본 미겔 사랄레기의 상반된 평가도 소개한다. 이 초상은 치세 전체를 설명하는 기록보다 역사로 구성한 논증으로 읽어야 한다.

자금과 동맹, 관대함의 한계

페르난도는 제XXI장에만 등장하지 않는다. 제XVI장에서 마키아벨리는 과시적인 관대함이 통치자의 자원을 고갈시키고 신민에게 부담을 지우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당시 스페인 왕이 후하게 베푸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누렸다면 그토록 많은 일을 이루고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돈을 쓰는 관대함이지 현대 정치의 자유주의가 아니다. 자원을 보존하면 행동의 자유도 보존할 수 있다.

제III장은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나폴리 왕국을 스페인 왕과 나눈 일을 비판한다. 그처럼 강한 동반자를 들여 불만을 품은 이탈리아인들에게 다른 보호자를 주고, 자신을 쫓아낼 수 있는 인물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페르난도는 경쟁자의 실수를 통해 드러난다. 이익을 나누는 듯한 협정이 전체 세력 균형을 바꿀 수 있었다. 외교가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에게 의존하는지를 바꾸기 때문이었다.

페르난도가 그 여우였을까

제XVIII장에는 유명한 여우와 사자의 조합이 나온다. 함정을 알아보는 꾀와 적을 겁주는 힘이다. 마키아벨리는 약속 위반과 통치자의 공적 모습·실제 행동 사이의 거리를 논한다. 끝부분에서는 평화와 신의를 끊임없이 설교하지만 둘 다 거스르는 이름 없는 동시대 군주를 언급한다. 이 인물을 페르난도로 보는 해석이 많았지만, 그 동일시에는 이견이 있다. 본문은 비교를 뒷받침할 수는 있어도 그의 이름을 적고 있지는 않다.

1504년의 왕위 계승을 보면 이 수수께끼를 풀지 않고도 문서에 근거해 칭호와 실권의 차이를 검토할 수 있다. 후아나는 이사벨의 적법한 후계자였다. 이미 아라곤 왕인 페르난도가 자기 소유의 카스티야 왕관을 후하게 내어 준 것이 아니었다. 이사벨의 유언은 특정 상황에서 그가 통치하도록 규정했다. 마드리드에 보낸 명령은 이 틀을 이용해 새 여왕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행정 권한도 주장했다. 문서는 후안 카를로스 갈렌데 디아스가 편찬한 시 문서의 학술판에 전한다.

그러나 이 장치가 계속된 장악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후아나의 남편 펠리페가 유력 카스티야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도전했다. 페르난도는 1506년 국정에서 물러났고, 펠리페는 그해 9월 사망했다. 페르난도는 1507년 통치에 복귀했다. 권력 회복은 정치적 회복력을 보여 주지만, 중단은 동맹과 상황에 대한 의존도 드러낸다. 이후 1509년 후아나가 토르데시야스에 감금된 일 역시 서술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그녀의 주권을 누가 행사하느냐의 싸움이었고 여왕 자신에게 오랜 영향을 남겼다.

마키아벨리도 비판할 수 있었던 왕

페르난도의 성공을 승리가 보장될 때만 싸운 사람의 증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가장 강한 반론은 마키아벨리 자신에게서 나온다. 1513년 4월 29일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페르난도를 현명하다기보다 교활하고 운이 좋은 인물로 평가했다.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벌인 공세는 왕의 모든 영토를 불필요한 위험에 빠뜨렸다고 비판한다. 최종 결과가 위험한 결정을 소급해서 신중한 판단으로 바꾸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 편지는 페르난도의 중요성을 뒷받침하면서 찬탄을 복잡하게 만든다. 마키아벨리는 논저 집필에 앞선 몇 달 동안 그의 결정을 면밀히 생각하고 있었다. 설명들을 검토하고, 왕의 모든 행보 뒤에 뛰어난 계획이 있다는 가정을 의심하며 정치적 능력과 행운을 구분했다. 왕은 중요한 살아 있는 분석 대상이었다. 모범이 될 수 있다고 무오류인 것은 아니었다.

페르난도와 이사벨에 연결되는 안정 또한 내전의 부재를 뜻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카스티야 통치는 1475–1479년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확보되었다. 비센테 앙헬 알바레스 팔렌수엘라의 연구는 이 갈등이 왕위의 상속과 왕권의 행사 방식 모두에 관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성취는 강력한 저항을 넘어 정부를 공고히 한 데 있었다. 내내 국내가 평화로웠다고 서술하면 그 공고화를 가능하게 한 과정이 지워진다.

보르자가 여전히 중요한 이유

페르난도의 우선성을 주장하더라도 체사레 보르자를 고려해야 한다. 제VII장은 다른 사람의 군대와 운으로 부상한 통치자가 어떻게 독립 기반을 세울 수 있는지 살핀다. 마키아벨리는 미래 변화에 대비해 지위를 확보하려는 시도를 포함해 보르자의 행동에 많은 지면을 쓴다. 보르자는 새로운 국가의 획득, 의존, 정치적 실패에 대한 논의에서 핵심이다. 경력이 나쁘게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제외할 수 없다.

페르난도를 지지하는 주장은 다른 척도, 즉 실제로 보여 준 권력의 폭과 지속성에 기댄다. 그의 사례는 자원, 군사력, 평판, 종교적 이미지, 경쟁자 관리를 연결한다. 따라서 그는 책 속에서 성공한 왕권의 가장 포괄적인 동시대 모델로 특히 유력하다. 이처럼 뜻을 한정하면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라고 부를 근거가 있다. 논저 전체가 그의 위장된 초상이라고 하면 증거를 넘어선다.

손자와 제국의 대가

카를 5세는 후대의 유익한 대조가 된다. 마리아 이네스 카르솔리오의 카를 치세 연구는 외국인 임명, 조세 요구, 왕의 제국 관련 책무가 불러온 반감을 설명한다. 이런 긴장은 1520–1521년 카스티야 코무네로스 봉기에 기여했다. 자신의 야심이 요구하는 것들이 통치자의 자원과 평판을 소모시킬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경고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카를이 물려받은 영토와 의무의 조합은 달랐고, 일부는 조부모의 왕조 동맹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신중한 할아버지와 무모한 손자의 대립만으로는 비교가 충분하지 않다.

『군주론』의 초고는 페르난도 2세 사망 3년 전인 1513년에 작성되었다. 당시 아라곤 왕은 유럽 궁정들에 잘 알려져 있었고,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원정, 동맹, 외교 결정이 반도의 정치·군사 균형을 크게 바꾸었다. 이 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1504년 11월의 왕실 명령은 그 수완의 한 측면을 보여 준다. 군주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도 정부 권한을 행사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페르난도만 마키아벨리의 사유에 영감을 준 것은 아니며, 피렌체의 사상가가 그의 모든 결정을 승인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동시대인 가운데 정복, 협상, 권력 보존에 그처럼 폭넓은 경험을 지닌 사람은 드물었다. 『군주론』이 페르난도만을 염두에 두고 쓰였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적 권위의 성립과 행사의 사례를 찾을 때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에게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을 발견했다는 점을 인정하면 충분하다.

출처: 마키아벨리: 『군주론』 이탈리아어 본문, 제III·VII·XVI·XVIII·XXI장; 마키아벨리가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보낸 편지, 1513년 4월 29일; 후안 카를로스 갈렌데 디아스: 이사벨의 죽음에 관한 마드리드 문서; 안토니오 가르가노: 마키아벨리와 귀차르디니의 페르난도, 83–104쪽; 조르조 스키킬로네: 체사레 보르자와 익명의 군주; 스페인 왕립역사학술원: 가톨릭 공동군주와 왕위 계승; 비센테 앙헬 알바레스 팔렌수엘라: 1475–1479년 카스티야 내전; 마리아 이네스 카르솔리오: 카를 5세의 정부와 코무네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