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8월 31일 아침, 한 행인이 화이트채플의 좁은 거리인 벅스 로에서 메리 앤 니컬스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빅토리아 시대 런던에서 가장 악명 높은 미스터리 중 하나가 될 연쇄 살인 사건의 시작이었다. 10주 뒤, 또 다른 여성 메리 제인 켈리가 도싯 스트리트 옆 골목의 작은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두 날짜 사이에 경찰은 여성 다섯 명의 죽음을 한 명의 살인범과 연결했다. 그러나 범인을 특정하지도, 누구를 기소하지도 못했다. 세상이 잭 더 리퍼라고 부르게 된 사건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피해자들까지 이름 없는 존재로 남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섯 명의 죽음, 하나의 수사

다섯 여성은 니컬스, 애니 채프먼,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 캐서린 에도스, 켈리였다. 채프먼은 9월 8일 발견됐다. 스트라이드와 에도스는 9월 30일 몇 시간 간격으로 살해됐고, 켈리는 11월 9일 발견됐다. 경찰이 사건들을 연결한 이유는 공격 방식의 유사성과 지리적 근접성 때문이지, 용의자가 자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더 넓은 화이트채플 지역에서는 다른 여성들도 살해됐으며, 후대의 저술가들은 어떤 사건을 같은 사건 묶음에 넣어야 하는지 논쟁해 왔다. ‘다섯 명’이라는 표현은 편리한 약칭일 뿐, 모든 불확실성이 해소됐다는 증거는 아니다.

신문은 정체불명의 살인범에게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이름을 붙였다. 9월 센트럴 뉴스 에이전시에 보내진, ‘Jack the Ripper’라는 서명이 담긴 편지가 그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작성자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는 이 편지가 런던 광역경찰청 기록에 남은, 자신이 살인범이라고 주장하는 수백 통의 편지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단서를 갈망하는 도시에서 서명 하나가 증거보다 더 멀리 퍼질 수 있었다. 별명은 독자들이 계속 따라갈 인물을 만들어냈고, 여성들은 폭력의 현장에 덧붙여 반복되는 이름 목록이 됐다.

신문 제목 너머의 이스트엔드

Digital image © London Museum
Digital image © London Museum

화이트채플은 범죄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무대가 아니었다. 1880년대 이곳은 낮은 임금과 불규칙한 일자리, 열악한 주거, 이주, 의류 산업의 영향을 받은 런던 이스트엔드의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가족이 방 하나를 함께 쓰기도 했고, 안정적인 집이 없는 사람들은 값싼 공동 숙박소와 거리를 오갔다. 비슷한 시기에 작성된 찰스 부스의 빈곤 지도는 인근의 많은 거리를 가장 가난한 계층을 나타내는 색으로 표시했다. 이 지도는 어려운 생활의 기록이지 모든 주민의 초상은 아니다. 이 지역은 일과 가족, 신앙과 공동체의 공간이기도 했다.

동유럽에서 온 유대인 난민들은 이 지역의 언어와 거리를 바꾸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재봉업과 관련 업종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다양성이 그들을 의심에서 지켜주지는 못했다. 살인 사건이 이어지는 동안 소문과 신문의 추측은 증거도 없이 유대인 주민들을 외부인이자 잠재적 범인으로 묘사하곤 했다. 런던 박물관은 반유대주의적 선입견이 범인을 찾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이 점은 중요하다. 수사는 사회와 동떨어진 채 진행되지 않았으며, 폭력에 대한 공포는 이민과 빈곤, 누가 런던에 속하는가를 둘러싼 오래된 편견과 뒤섞였다.

여성들 자신의 삶은 흔히 하나의 꼬리표로 축소됐다. 당시 기자들과 후대의 기록은 다섯 명 모두를 매춘 여성으로 묘사했다. 이 주장은 이야기를 단순하게 만들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기 쉽게 했다. 런던 박물관의 검토에 따르면, 살해 당시 성산업에 종사한 것으로 확인되는 사람은 켈리뿐이다. 나머지는 생계 방식과 인간관계, 주거 상황이 서로 다른 가난한 여성들이었으며, 일부는 자녀가 있었다. 남아 있는 기록은 불완전하다. 문서가 침묵하는 부분에서 내밀한 생각이나 빈틈없이 정리된 전기를 지어내는 것은 옳지 않다.

대중에게 퍼져나간 사건

런던 광역경찰청은 아직 현대적인 형사 수사 조직을 구축하는 중이었다. 수사관들은 순찰하고 목격자를 면담하고 용의자를 추적했지만, 이 살인 사건들로 피고인을 법정에 세우지는 못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는 범인을 추적하려는 노력과 관련된 경찰 서신과 기록이 보존돼 있다. 이 자료들은 용의자 명단보다 더 값진 것을 보여준다. 빈틈과 불확실성, 당시 활용할 수 있었던 수단의 한계를 지닌 실제 수사의 모습이다. 후대의 어떤 이론도 메모나 신문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름을 입증된 살인범으로 바꿀 수는 없다.

한편 언론은 이야기를 바다 건너로 전할 수 있었다. 대서양 횡단 케이블 덕분에 해외 소식의 신속한 전달이 가능해졌고, 1888년 말까지 미국 신문들은 화이트채플 관련 보도를 싣고 있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신문 안내 자료에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여러 도시의 기사가 나열돼 있다. 보도는 경찰의 새 소식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추측과 생생한 묘사, 언제나 검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닌 주장까지 퍼뜨렸다. 재게재될 때마다 미스터리의 독자는 늘어났고, 런던과의 거리는 소문이 사실처럼 굳어지기 쉽게 만들었다.

경찰이 수사 세부 내용에 침묵하자 설명을 내놓으려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런던 박물관은 신문들이 그 공백을 이론과 선정적인 언어로 채운 과정을 기록한다. 런던 언론에 관한 역사 연구는 이러한 보도가 성장하는 대중 신문 문화에 기반했음을 보여준다. 악순환이 형성됐다. 대중의 불안은 새 소식을 요구했고, 편집자들은 관심을 얻기 위해 경쟁했으며, 정체불명의 살인범 이야기는 점점 극적으로 변했다. 오늘날의 기록은 그 서사의 일부를 바로잡을 수 있지만, 수사관들이 끝내 얻지 못한 판결을 제공할 수는 없다.

미스터리가 남긴 것

살인은 1888년 11월 이후 멈췄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연관된 살인이 더는 없었다고 사건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세기 동안 용의자 추측과 책, 영상 각색이 이어질 여지가 생겼다. 어떤 이론은 기록에 기초하고, 어떤 이론은 추정에 의존한다. 확신에 찬 어조가 증거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가장 책임 있는 서술은 범인의 신원을 미확정 상태로 남겨둔다. 또한 이야기를 더 깔끔하게 만든다는 이유만으로 런던 동부에서 살해된 모든 여성을 리퍼의 피해자로 묶는 데에도 저항한다.

한 세기가 지난 뒤에도 이어지는 이 이야기는 신원을 밝혀내지 못한 살인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도시가 가장 가난한 거리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선정적인 보도가 공포와 편견을 어떻게 키웠는지, 여성들의 삶이 그들이 겪은 폭력으로 어떻게 축소됐는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니컬스, 채프먼, 스트라이드, 에도스, 켈리는 일하고 관계를 맺으며 혹독한 제약 속에서 삶을 꾸려가려 했던 사람들이었다. 기록이 남기지 못한 모든 것을 되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살인범의 만들어낸 이름만 독자의 기억에 남게 하는 일은 거부할 수 있다.

출처: 런던 박물관: 잭 더 리퍼,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화이트채플 교육 자료,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런던 광역경찰청 보고서 목록, 미국 의회도서관: 당시 신문 안내, 예일대학교 출판부: Jack the Ripper and the London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