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대한 독재자의 시사회에 참석한 폴레트 고다르, 찰리 채플린, 팀 듀랜트.
영화 위대한 독재자의 시사회에 참석한 폴레트 고다르, 찰리 채플린, 팀 듀랜트.

1940년 10월 15일, 뉴욕 관객들은 찰리 채플린이 두 역할을 맡은 영화를 봤다. 한 명은 독재자이고, 다른 한 명은 그 정권에 박해받는 유대인 이발사였다. 위대한 독재자는 캐피톨과 애스터 극장에서 동시에 처음 상영됐다. 채플린 기록보관소에 남아 있는 그날 날짜의 사진에는 감독과 폴레트 고다르, 팀 듀랜트가 함께 찍혀 있다. 그 저녁이 남긴 구체적인 기록이다. 당시 스크린에 무엇이 등장했는지 이해하려면 유럽이 전쟁으로 향하던 시기에 준비된 기획으로 돌아가야 한다.

중립으로 남을 수 없었던 영화

뮌헨 협정이 체결되던 1938년 가을, 채플린은 철저히 비밀에 부친 시나리오의 초고를 쓰고 있었다. 역사학자 크리스티앙 들라주는 채플린 사무국이 발표한 글에서 이 과정을 재구성한다. 영화가 완성될 무렵 세계는 달라져 있었다. 영국은 1939년 9월 참전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전쟁 밖에 있었다. 미국에 살던 영국 시민 채플린은 이 전쟁이 미국의 전쟁이 되기 전에 히틀러를 풍자하는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이 선택은 연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떠돌이 캐릭터로 알려져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관객에게 몸짓으로 뜻을 전하던 예술가가 이제 대사가 있는 영화를 이끌어야 했다. 익숙한 인물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 이상이었다. 들라주의 해석에 따르면 말한다는 것은 누구나 이해하던 그 가면의 보호에서 벗어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정치적 항의와 영화 언어의 변화가 함께 이뤄졌다. 설명 없이 사람을 웃겨온 그는 무성 영상에 대한 해석에만 맡기지 않을 말을 전하려 했다.

폭군과 이발사

이야기는 가상의 나라 토매니아를 무대로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한 병사는 기억을 잃고, 여러 해 뒤 이발소로 돌아오지만 주변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른다. 역시 채플린이 연기한 독재자 힌켈은 유대인을 박해한다. 제작사의 공식 줄거리는 이발사가 되찾으리라 기대하는 평범한 생활과 실제로 마주하는 폭력의 충돌을 설명한다. 폴레트 고다르가 연기한 한나도 이 위협받는 세계에 속한다. 두 주인공의 닮은 외모 덕분에 같은 얼굴이 박해를 명령하는 사람과 그 박해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을 함께 나타낼 수 있었다.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에서 힌켈은 지구본 모양의 풍선을 가지고 놀며 춤춘다. 풍선은 떠오르고 그의 동작을 따라 움직이다가 결국 터진다. 제프리 밴스는 미국 의회도서관 국립영화등재목록을 위해 쓴 글에서 이 장면을 세계 지배의 환상을 보여주는 이미지로 해석한다. 풍자는 정치 연설을 재현하지 않고도 야망을 드러낸다. 잠시 정복은 통치자의 손안에 든 장난감처럼 보이지만, 풍선이 터지면서 모든 것을 통제한다는 환상이 무너진다.

관객에게 보여줄 것을 통제한 제작

이야기를 만드는 동안 채플린은 스튜디오 밖으로 나갈 사진도 세심하게 관리했다. 볼로냐 영화자료관이 디지털화한 기록은 제작 사진을 홍보 수단으로 선별했다고 설명한다. 1940년 2월에는 대형 대포 모형을 촬영지로 운반하는 사진이 공개됐다. 다른 사진에는 군복을 입은 채플린이 있었지만, 촬영감독 롤리 토서로가 스타 본인보다 더 눈에 띄었다. 대중이 영화 제작을 안다고 해서 가장 뛰어난 장면까지 미리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기록에 따르면 면도 장면과 마지막 연설, 힌켈이 지구본 풍선과 춤추는 장면의 공식 스튜디오 사진은 없었다. 다만 다른 제작진이 찍은 비공식 사진 일부는 남았다. 영화 사진이 널리 배포되기 시작한 때는 1940년 8월 말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을 미리 드러내지 않으면서 기대를 조절하는 방식이었다. 기록을 통해 현장 대화를 지어내거나 개봉 전 모든 관객의 생각을 상상하지 않고도 그 전략을 따라갈 수 있다.

코미디가 직접적인 호소로 바뀔 때

결말은 외모의 닮음을 이용해 권력을 뒤집는다. 이발사가 독재자로 오인돼 군중 앞에서 연설해야 한다. 공식 연설문에는 어조의 변화가 드러난다. 그 목소리는 지배와 정복을 거부하고 증오를 비난하며, 기계가 파괴적으로 사용되는 현실 앞에서 인간성을 요구한다. 군인들에게도 자신을 도구로 만드는 자들에게 의지를 넘기지 말라고 호소한다. 상세한 국정 운영 계획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할지에 관한 도덕적 선택을 내놓는다.

결말에 대한 반응은 한결같지 않았다. 채플린 사무국은 감독이 연설문을 쓰고 고치는 데 여러 달을 보냈고, 어떤 이들은 불필요하다고 여긴 반면 다른 이들은 용기를 얻었다고 설명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영화를 언제나 만장일치로 환영받은 작품으로 다루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웃음을 만드는 방식에서 벗어나며 채플린은 또 다른 위험을 감수했다. 진지하게 들어달라고 부탁하는 순간, 관객이 코미디언을 더는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밴스의 글은 첫 상영 뒤 언론 반응이 대체로 호의적이었으나 영화의 길이와 반복에 대한 이견도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여러 나라의 상영 금지가 배급을 제한했다고 지적한다. 영화는 유통될 수 있었지만 모든 관객에게 같은 방식으로 닿지는 못했다. 그 존재가 풍자로 전쟁을 멈출 수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 누가 이길지 아는 후대의 확신이 아니라, 전쟁의 결과가 아직 불확실할 때 이뤄진 문화적 개입을 보여준다.

86년이 지난 개봉 기념일에는 영화와 떨어져 나온 연설 이상의 것을 되찾아볼 수 있다. 돌아온 뒤의 폭력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발사, 세계를 소유물로 여기는 독재자, 장면을 보호하려고 공개를 보류한 사진, 마지막에 말하기로 한 배우가 있다. 기록은 뉴욕의 그 저녁을 꾸미지 않고도 이 과정을 뒷받침한다. 채플린은 권력에 관한 코미디를 만들었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웃음이 함께 책임진다는 의식으로 이어지기를 관객에게 요청하는 일이었다.

출처: 채플린 기록보관소: 1940년 10월 15일 첫 상영 사진, 크리스티앙 들라주: 위대한 독재자의 촬영, 채플린 기록보관소: 사진과 언론, 공식 줄거리, 마지막 연설과 채플린 사무국의 설명, 제프리 밴스: 국립영화등재목록을 위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