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첫 석유 위기는 한 운전자가 텅 빈 주유기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출발점은 욤키푸르 전쟁 중 아랍 산유국 장관들이 쿠웨이트에 모여 내린 1973년 10월 17일의 결정이었다. 이들은 매달 생산량을 줄이겠다고 발표하면서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와 팔레스타인인 권리 회복을 정책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며칠 안에 미국도 금수 조치의 대상이 됐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모든 아랍산 석유 공급이 하룻밤에 중단된 것도,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 전체가 하나의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었다. 감산과 특정 국가에 대한 수출 금지, 가격 변화가 연이어 일어나며 석유 의존 경제가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드러낸 위기였다.
전쟁과 공수 작전, 그리고 석유 결정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유대교 속죄일인 욤키푸르에 이스라엘 진지를 공격했다. 전쟁에는 각자의 협력국에 물자를 공급하던 미국과 소련도 관여했다. 워싱턴이 이스라엘에 군사 장비를 대규모로 공수하기 시작하자, 아랍 산유국들은 산업 경제가 의존하던 자원을 외교적 압박 수단으로 사용했다.
결정의 중심에 있던 조직은 아랍석유수출국기구, 즉 OAPEC였다. 석유수출국기구 OPEC 전체가 아니었다. 10월 17일 회원국들은 매달 생산량을 최소 5% 줄이고 추가 감산도 할 수 있다는 데 합의했다. 당시 미국 정보기관의 메모는 이 조치와 공개적으로 제시된 정치적 조건을 기록했다. 정책은 국가별로도 달랐다. 우호국으로 간주된 나라는 비교적 정상적인 공급을 받을 수 있었고, 중립국은 공급 축소를 감수해야 했으며, 이스라엘을 지지한다고 판단된 정부는 제재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첫날의 공개 발표에서 미국이 따로 지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관리들은 이미 감산을 워싱턴에 효과적인 압박으로 작용하게 할 방법을 논의하고 있었다. 10월 19일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으로 향하는 석유 선적에 금수 조치를 발표했다. 다른 아랍 생산국들도 제한에 나섰으며 네덜란드, 포르투갈,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시 조치의 대상이 됐다. 정부 기록이 보여주는 것은 변화하는 정책이지, 미국행 유조선을 단번에 모두 멈춰 세운 하나의 결정이 아니다.
충격이 그토록 빠르게 퍼진 이유
금수 조치는 이미 변하고 있던 시장을 강타했다. 미국의 국내 생산은 정체됐고 소비는 늘었으며 수입의 중요성은 커졌다. 위기 이전 몇 년 동안 석유는 풍부하고 비교적 저렴한 자원처럼 보였다. 많은 운전자와 기업은 장기적인 공급 중단에 대비할 이유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공급이 줄자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졌고 가격은 급격히 상승했다.
미국 국무부의 역사 해설은 수출 금지와 감산을 함께 작동한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 감산이 금수 대상국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급 자체를 줄였기에 정치적 조치는 시장 충격이 됐다. 석유는 국제적인 체계 안에서 거래된다. 한 경로가 제한되면 구매자들이 대체 물량을 확보하려고 경쟁하면서 다른 지역의 가격도 오를 수 있다. 따라서 직접 금수 조치를 받지 않은 나라들도 영향을 받았으며, 동맹국들 역시 자국 공급과 국민의 불안에 대응해야 했다.
미국에서는 주유소와 국가 정책에서 영향이 나타났다. 운전자들은 긴 줄과 영업시간 단축, 품절, 휘발유를 절약하기 위한 제한을 경험했다. 위기는 에너지가 계속 저렴하고 풍부할 것이라는 전제도 흔들었다. 닉슨 행정부는 절약을 촉구하며 전국 최고 제한속도 인하와 연중 서머타임 시행 재개 등을 제안했다. 의회는 1974년 1월부터 서머타임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긴급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나 겨울 아침이 어둡다는 불만이 제기되면서 이 실험의 시행 기간은 나중에 단축됐다.
대응이 에너지 정책을 바꾸다
금수 조치는 전쟁 이후의 협상과 외교적 진전을 거쳐 1974년 3월 끝났다. 그러나 공급 차질을 심각하게 만든 근본적인 의존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은 에너지 안보를 단순한 국내 생산 문제가 아니라 외교 정책과 경제 계획, 기반시설의 문제로 생각해야 했다.
의회는 새로운 규정으로 대응했다. 1973년 긴급석유배분법은 연방정부가 석유제품의 배분과 가격을 통제할 수 있도록 했다. 1975년 에너지정책·보존법은 향후 공급 중단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정부 비축분인 전략비축유의 창설을 허용했다. 이 법은 신차의 연비 기준도 도입했다. 이런 조치가 세계시장으로부터 미국을 독립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해외의 차질이 곧바로 국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인식을 제도로 정착시켰다.
위기는 이미 논의 중이던 변화도 앞당겼다. 에너지 절약, 더 작고 효율적인 자동차, 대체에너지 연구, 다른 산업국과의 공조가 그것이다. 일부 정책은 일시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더 큰 방향 전환은 지속됐다. 정부들은 시장이 언제나 안정된 가격에 충분한 물량을 공급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대신, 석유 공급을 전략적인 취약점으로 보고 부족 사태에 대응할 수단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금수 조치가 입증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1973년을 산유국들이 석유 공급을 완전히 끊어 서방을 멈춰 세운 순간으로 기억하기 쉽다. 기록은 더 복잡하다. OAPEC의 감산과 특정 국가를 겨냥한 금수 조치는 상당한 규모였지만 공급은 계속됐고, 가격과 교역 양상이 달라졌으며, 영향도 국가별로 달랐다. 금수 조치는 전쟁 중 압박 수단을 행사한 것이지 산업 세계로 향하는 석유를 완전히, 영구적으로 끊은 일이 아니었다.
또한 석유 생산자만이 모든 결과를 통제했다는 뜻도 아니었다. 미국의 취약성은 수입 의존도 상승과 수요 증가, 단기간에 활용할 대안 부족을 반영했다. 소비자들이 공급을 신속히 대체할 여지가 거의 없었기에 생산자들은 비용을 부담시킬 수 있었다. 정치적 압박의 힘은 그 불균형에 있었다.
금수 조치로서의 위기는 끝났지만 에너지 환경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멀리서 내려진 결정이 아침 출근길과 난방비, 연방법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에게 뚜렷이 남겼다. 오래 남은 교훈은 석유를 무기로 쓸 수 있다는 데 그치지 않았다. 값싼 연료를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가 불과 몇 주 만에, 일상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세계적 체계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출처: 미국 에너지부: 1973년 10월, 첫 에너지 위기, 미국 국무부 역사실: 1973~1974년 석유 금수 조치, 미국 외교문서집(FRUS): 10월 17일 결정에 관한 CIA 메모, FRUS: 10월 17일 리야드 주재 미국 대사관 보고, 미국 에너지부: 전략비축유의 기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