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10월 27일, 뉴욕에서는 30분도 걸리지 않은 열차 운행이 도시의 성장 방향을 바꿀 첫걸음이 됐다. 오후 2시 30분이 조금 지난 뒤 조지 B. 매클렐런 주니어 시장은 시청역에서 개통 기념 열차의 운전대를 잡았다. 26분 후 열차는 145번가에 도착했다. 일반 시민이 승차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날 저녁 7시부터였다. 미국 의회도서관에 따르면 하루가 끝날 무렵 새 지하철을 탄 사람은 11만 명을 넘었다.
개통식은 도시 전체의 큰 행사였지만, 지하철이 풀어야 할 문제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갈수록 붐비는 맨해튼을 어떻게 이동할 것인가. 지상에서는 마차와 노면전차, 고가철도가 공간을 나눠 쓰고 있었다. 1888년의 눈보라는 지상 교통이 얼마나 쉽게 마비될 수 있는지 보여 줬다. 지하 교통은 수십 년 동안 논의됐지만, 쓸 만한 철도를 만들려면 터널만으로는 부족했다. 건설비를 마련하고, 계속 쓰이는 거리 아래에서 공사를 진행하며, 안정적으로 열차를 운행해야 했다.
시가 소유하는 철도
전 시장 에이브럼 S. 휴잇은 민간 투자자만으로는 이처럼 비싼 사업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봤다. 1894년 유권자들은 시가 철도를 소유하고 공공 자금으로 건설하되, 민간 회사에 임대해 운영을 맡기는 계획을 지지했다. 이후 인터버러 래피드 트랜짓 회사(IRT)가 운영을 맡았다. 완전한 사철도 아니고 일반적인 시청 부서도 아닌 이 방식은 오랫동안 멈춰 있던 계획을 추진할 수 있게 한 해법이었다.
건설업자 존 B. 맥도널드가 공사 계약을 따냈고 은행가 오거스트 벨몬트가 자금 조달을 뒷받침했다. 수석 엔지니어 윌리엄 바클레이 파슨스는 건물이 빽빽한 거리 아래로 많은 승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 전기 동력을 택했다. 공사는 1900년 3월 시작됐다. IRT가 1904년에 펴낸 기념 책자에도 자금 문제에 대한 의구심, 소송, 하수도와 가스관, 수도관, 케이블, 건물 기초 사이에서 공사해야 하는 기술적 난관이 나온다. 건설자들을 기리는 책이지만, 왜 이 사업이 한때 실현하기 어려워 보였는지도 알려 준다.
거리 아래에서 보낸 4년
노선의 상당 부분은 도로를 파헤쳐 철도 구조물을 만든 뒤 다시 덮는 개착식 공법으로 지어졌다. 간단한 설명과 달리 현장의 지반은 곳마다 달랐다. IRT 책자는 어떤 구간에서는 암반이 거의 도로 표면까지 올라왔고, 커낼 스트리트 근처에는 물을 머금은 모래층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기존 교통을 무작정 중단할 수도 없었다. 임시 지지대가 지하 설비와 도로 구조물을 떠받쳤다. 공사는 지상의 동네 생활을 방해했으며, 노동자들에게도 위험했다.
뉴욕시 랜드마크 보존위원회의 자료는 당시 공사가 대체로 고되고 위험했으며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아프리카계 미국인 노동자가 주요 인력이었다고 설명한다. 지하철 이야기에는 주로 시장과 금융가, 엔지니어의 이름이 남는다. 노동자들을 함께 기억하면 사업의 규모가 달리 보인다. 승객 한 사람이 계단을 내려갈 수 있게 되기까지, 역마다 수많은 판단과 육체노동이 필요했다.
노선이 열어 준 가능성
뉴욕 교통박물관에 따르면 개통 당시 노선은 길이 약 14.6킬로미터에 역 28개였다. 시청역에서 그랜드 센트럴과 타임스스퀘어를 지나 145번가까지 이어졌다. 오늘날 익숙한 전체 지하철망이 아니라, 더 큰 체계의 초기 구간이었다. 네 개의 선로 덕분에 모든 역에 서는 완행열차와 더 빠른 급행열차가 서로 다른 이동 수요를 맡을 수 있었다. IRT의 1904년 책자는 승객이 추가 요금을 내지 않고 두 종류의 열차 사이를 갈아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건축에도 포부가 담겼다. 시청역에는 곡선 승강장, 타일로 마감한 아치형 천장, 채광창과 샹들리에가 있었다. 건축가 조지 하인스와 크리스토퍼 라파지가 역을 설계했고 라파엘 과스타비노가 타일 천장을 만들었다. 대중교통 출입구를 세심하게 설계할 만한 공공 공간으로 대했다는 뜻이다. 역은 1945년 승객에게 문을 닫았지만, 선로는 지금도 열차 회차에 쓰인다. 남아 있는 공간은 어떤 기념 구호보다 첫 노선의 야심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에디슨 회사의 촬영기사들은 개통 행사를 영상에 남겼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필름 목록에는 시청역으로 들어가는 관리들, 역 밖의 군중, 브루클린 브리지역에 드나드는 열차가 기록돼 있다. 영상은 행사의 공개적인 모습을 보여 주지만, 모든 승객의 마음까지 보여 주지는 않는다. 같은 날 기념 열차는 귀빈들을 태우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부터 지하철은 역에 갈 수 있는 시민의 일상적인 교통수단이 됐다.
개통만으로 해결되지 않은 일
새 노선이 생겼다고 거리가 한산해지거나 도시 교통을 둘러싼 논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소장한 기술사 자료에 따르면 열차와 승강장의 혼잡은 거의 곧바로 불만을 낳았다. 노선에 몰린 수요 자체가 더 큰 수송력이 필요하다는 증거였다. 다른 운영사와 새 노선이 뒤따랐고, 경쟁하던 체계는 1940년 시의 관리 아래 통합됐다.
지하철은 사람들이 살고 사업할 수 있는 곳의 범위도 바꿨다. 뉴욕시의 보존 관련 보고서는 IRT가 맨해튼 북부에 들어온 일과 오듀본 파크 주변의 빠른 아파트 건설을 연결한다. 또 1905년부터 1920년까지 125번가 북쪽 맨해튼 인구가 265% 늘었다고 기록한다. 그 증가를 한 노선의 영향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 교통편 덕분에 오래된 상업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도 훨씬 쉽게 갈 수 있었다. 첫 운행은 짧았지만, 뉴욕 시민의 거주지 선택에 미친 영향은 수십 년에 걸쳐 나타났다.
오늘날 개통일을 돌아볼 때는 기념 열차와 그날 저녁 뒤따라 탄 시민을 함께 떠올릴 수 있다. 매클렐런의 26분 운행은 설비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시민들의 호응은 맨해튼의 큰 구간을 지하로 통과하는 새로운 일상의 시작을 보여 줬다. 첫 노선은 길지 않았고 역은 곧 붐볐으며 확장은 앞으로의 과제였다. 그래도 1904년 10월 27일, 오랫동안 논의되던 계획이 실제로 달리는 도시 교통수단이 됐다.
출처: https://www.loc.gov/item/today-in-history/october-27/ ; https://www.nytransitmuseum.org/subway-day/ ; https://www.gutenberg.org/cache/epub/17569/pg17569-images.html ; https://s-media.nyc.gov/agencies/lpc/lp/2374.pdf ; https://www.nytransitmuseum.org/old-city-hall/ ; https://www.loc.gov/item/2016600205/ ; https://tile.loc.gov/storage-services/master/pnp/habshaer/ny/ny0300/ny0387/data/ny0387data.pdf ; https://s-media.nyc.gov/agencies/lpc/lp/2335.pd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