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6년 스페인인 항해사 바르톨로메 루이스는 오늘날 에콰도르 앞바다에서 커다란 돛단배를 만났다. ‘사마노-헤레스 보고서’로 알려진 기록에는 발사나무 통나무를 묶어 만든 뗏목, 사람과 화물을 싣는 높은 갑판, 돛대와 삭구, 면직물 돛이 묘사돼 있다. 기록자들은 그 돛을 자신들이 아는 스페인 선박의 돛과 비교했다. 배에 탄 이들은 표류하던 조난자가 아니라 상인이었다. 먼 섬의 수수께끼를 논하기 전에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남아메리카 태평양 연안 사람들은 큰 배를 만들고 돛을 이용해 운항할 줄 알았다.
그렇다고 잉카 국가가 함대를 보내 대양을 횡단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큰 주장은 서로 성격이 다른 자료에 기대고 있다. 스페인 정복 수십 년 뒤에 기록된 이야기, 서쪽의 땅을 찾아 페루에서 떠난 항해, 태평양 섬 주민의 조상을 살핀 현대 연구가 그것이다. 각각 답하는 질문이 다르다. 이를 하나의 결정적 증거로 묶으면 이야기는 단순해지지만, 실제 역사는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16세기 기록에 등장하는 두 섬
페드로 사르미엔토 데 감보아는 1572년 『잉카의 역사』(Historia índica)를 썼다. 그는 훗날 통치자가 되는 투팍 유판키가 만타·푸나·툼베스 인근 해안에 있었으며, 그곳에 서쪽에서 온 상인들이 돛을 단 뗏목을 타고 도착했다고 적었다. 상인들은 사람이 살고 금이 풍부한 섬 두 곳을 말했는데, 이름은 아우아춤비와 니나춤비 등으로 다르게 표기된다. 기록에 따르면 투팍은 뗏목을 많이 만들게 하고 거대한 병력을 이끌고 떠났다가 9개월 또는 1년 뒤에 돌아왔다. 사르미엔토는 그 항해에서 가져왔다고 하는 물건을 보관했다는 사람의 이름까지 남겼다.
이 기록은 16세기에 어떤 이야기가 전해졌는지 보여 주는 자료다. 그러나 항해일지는 아니다. 사르미엔토는 마법으로 날 수 있는 사람, 2만 명이 넘는 병사를 태운 함대, 말의 턱뼈가 포함된 전리품도 언급했다. 본인도 믿기 어렵게 들릴 것이라고 인정했다. 두 섬의 방향이나 지도, 확인 가능한 위치는 제시하지 않았다. 후대 연대기 작가들이 항해 이야기를 되풀이했지만, 반복된 전승이 별도의 고고학적 발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르미엔토는 잉카 통치자를 정복자로 그려 스페인의 지배를 정당화하던 식민지 사업의 맥락에서 글을 썼고, 자신도 서쪽 탐험에 관심이 있었다.
카야오에서 떠난 탐험대가 실제로 따른 것은
그 전승과 스페인 항해 사이에는 실제 연결고리가 있다. 다만 유럽인이 잉카의 해로를 알고 있었다는 주장보다는 범위가 좁다. 총독 로페 가르시아 데 카스트로가 승인한 알바로 데 멘다냐의 탐험대는 1567년 11월 19일 리마의 항구 카야오를 떠났다. 탐험대에서 선장과 지리·천문 지식을 다루는 전문가로 일한 사르미엔토는 서쪽 섬을 찾는 계획을 밀어붙였다. 그는 나중에 쓴 연대기에서 11월 30일 투팍과 관련된 섬을 알아봤지만 멘다냐가 상륙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항로를 재구성한 한 연구는 그때 구름을 육지의 징후로 잘못 본 것으로 해석한다. 어느 쪽도 특정 섬의 위치를 확정하지 못한다.
스페인인들은 자신들의 배와 항해사, 계산에 따라 운항했다. 사르미엔토, 멘다냐, 수석 항해사 에르난 가예고는 항로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모두가 인정하는 잉카의 항로를 그릴 수 없다. 처음에는 남서쪽을 수색하다가 이후 더 북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1568년 2월 7일, 수천 킬로미터 서쪽에 있는 오늘날 솔로몬제도의 산타이사벨섬에 도착했다. 탐험 기록을 검토한 해클루트 학회는 태평양 해류 때문에 가예고가 항해 거리를 크게 과소평가했다고 설명한다. 이 항해는 서쪽 땅에 관한 소식이 스페인의 탐험을 자극했음을 보여 준다. 멘다냐가 솔로몬제도나 라파누이까지 알려진 잉카 항로를 다시 따라갔다는 증거는 아니다.
이후 카야오를 떠난 모든 배를 같은 이야기에 넣어서도 안 된다. 1595년 멘다냐의 두 번째 탐험은 솔로몬제도로 돌아가려 했지만, 대신 마르키즈제도와 산타크루스제도를 만났다. 이 항해에는 별도의 식민지 목표와 항해상의 문제가 있었다. 스페인 탐험대가 페루에서 더 많이 출발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두 잉카 항해자의 지시를 물려받아 항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라파누이: 접촉의 흔적은 있지만 탐험대는 알 수 없다
현대 유전학은 태평양을 둘러싼 논의를 바꿨지만, 항해자의 신원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2020년 연구는 오늘날 동폴리네시아에 사는 사람들을 분석해 여러 섬 집단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계통의 조상 성분을 발견했다. 통계 모형은 접촉 시기를 라파누이 정착 이전인 12~13세기 무렵으로 추정했다. 비교에 사용한 집단 중에서는 그 아메리카 계통 신호가 오늘날 콜롬비아 사람들과 가장 가까웠다. 이는 통계적 유사성이지 중세 선원들의 이름이나 정확한 출신지는 아니다. 추정 시기 역시 투팍 유판키가 다스리기 전이다.
2024년에는 프랑스의 박물관에 보관된 과거 라파누이 주민 15명의 전체 유전체를 분석한 연구가 나왔다. 이들은 유럽인이 섬에 처음 도착한 뒤에 살았으며, 그보다 이른 접촉 시기는 유전적 양상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으로 추론했다. 연구진은 이들의 조상이 대부분 폴리네시아 계통이며, 아메리카 원주민 계통은 평균 약 10%라고 밝혔다. 조상 집단이 섞인 시기는 대략 1250~1430년으로 추정했다. 이는 투팍에게 돌려지는 15세기 말의 항해보다 앞선다. 비교 결과 중앙 안데스 지역 집단이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웠지만, 연구진은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일부 지역의 고대 표본이 부족하다고 경고했다. 앞선 연구의 콜롬비아 유사성과 뒤 연구의 안데스 유사성은 서로 다른 표본과 방법에서 나온 결과다. 두 곳의 정확한 출항 항구를 뜻하지 않는다.
이런 결과를 보면 유럽인 도착 이전에 아메리카와 폴리네시아 사이에 접촉이 있었다는 견해를 쉽게 물리치기 어렵다. 다만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서쪽으로 항해했는지,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동쪽으로 갔다가 대륙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는지, 여러 번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아메리카 원산으로 유럽인 도착 전에 폴리네시아에서도 재배된 고구마는 또 다른 단서다. 어떻게, 언제 전해졌는지 역시 논쟁이 있다. 어느 단서도 잉카 황제 한 사람을 가리키거나 그의 함대가 라파누이에 상륙했음을 입증하지 않는다.
섬의 석조 유적을 다시 살피는 연구자들도 있다. 고고학자 애솔 앤더슨은 2021년 비나푸의 아후 타히리 정면에 정교하게 맞춰 쌓은 돌과 다른 특징들이 아메리카의 영향 가능성을 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가설과 체계적인 연구 요청이지, 잉카 건축자가 만들었다는 입증은 아니다. 두 벽이 비슷하다고 해서 누가 돌을 다듬었는지는 알 수 없다. 라파누이의 정착사와 언어, 거대한 석조물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폴리네시아의 것이다. 접촉 가능성을 인정해도 주민들의 성취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갈라파고스가 보여 주는 다른 결과
갈라파고스의 자료는 다르며,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정도도 약하다. 토마스 데 베를랑가 주교는 1535년 4월 26일 자 편지에서 파나마에서 남아메리카 해안으로 가던 배가 항로를 벗어났다고 기록했다. 일행은 3월 10일 섬을 발견하고 거대한 거북과 이구아나, 부족한 담수를 보았다고 한다. 현재 알려진 갈라파고스에 관한 가장 오래된 유럽인의 기록이지만, 그보다 앞서 아무도 방문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1950년대 토르 헤이에르달과 에리크 셸스볼드는 그곳에서 토기 조각을 모으고, 페루와 에콰도르의 어민이 콜럼버스 이전에 방문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다른 연구팀은 2005년 해당 장소를 다시 발굴하고 2016년 재평가를 발표했다. 오래돼 보이는 토기는 후대의 유리와 금속 등 다른 물건과 섞여 있었고, 연대 분석은 조사된 인간 활동이 유럽인 도착 이후 역사시대에 속함을 보여 줬다. 연구자들은 16세기 이전의 인간 활동을 입증할 흔적을 찾지 못했다. 이 결론은 현재 남아 있는 고고학 자료에 관한 것으로, 흔적이 남지 않은 상륙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잉카가 갈라파고스에 왔다는 사실은 입증되지 않았다.
돛과 해류, 이야기의 한계
다시 루이스가 만난 돛단뗏목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정복 초기 기록에 나온 면직물 돛은 특히 에콰도르 해안 상인들의 발달한 원주민 항해 기술을 보여 준다. 유럽의 영향을 입증하지 않으며, 무조건 잉카 국가의 업적으로 돌려서도 안 된다. 연안 무역에 쓰인 배라면 더 먼 바다로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해 능력이 있다는 것과 특정 날짜에 특정 섬에 도착했다는 증거는 다른 문제다.
가장 분명한 답이 가장 흥미롭기도 하다. 16세기 연대기 작가는 투팍 유판키가 서쪽으로 항해했다는 전승을 기록했고, 그 전승은 카야오에서 출발한 스페인의 탐색에 영향을 줬다. 오늘날 유전 연구는 유럽인이 태평양을 건너기 전에 아메리카 원주민과 폴리네시아 사람들 사이에 접촉이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사르미엔토 이야기 속 섬들은 아직 어디인지 알 수 없다. 현재의 연대와 증거로 접촉을 투팍에게 연결할 수 없고, 갈라파고스에서도 확실한 잉카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진짜 항해 지식을 지닌 사람들이 태평양을 건넜다. 누가 각각의 항해를 했고 어느 해안에서 서로 만났는지는 아직 남은 자료로 답할 수 없다.
출처: 안토니오 하라미요가 분석한 사마노-헤레스 기록과 초기 뗏목 자료; 사르미엔토 데 감보아, 『잉카의 역사』 46장; 사르미엔토의 식민지 서술에 관한 연구; 스페인 해군, 멘다냐의 첫 탐험; 해클루트 학회, 멘다냐 항해 기록 안내;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 멘다냐 항로 분석; 이오아니디스 외, Nature, 2020년; 모레노-마야르 외, Nature, 2024년; 스미스소니언 미국 인디언 국립박물관, 투팍의 통치; 앤더슨, Journal of the Polynesian Society, 2021년; 베를랑가의 편지, 1535년; 앤더슨 외, Latin American Antiquity, 2016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