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앙 아벨란제가 스탠리 라우스를 꺾기 3년 전, 테오필로 살리나스 풀러는 브라질 후보를 알리기 위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미 축구를 이끌던 이 페루인에게는 대표단이 있었고, 지켜야 할 월드컵 출전권이 있었으며, 지지할 도전자가 있었다. 아벨란제는 선거운동의 얼굴이 됐다. 살리나스는 그를 뒷받침할 연대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이 계획은 1971년 6월 24일 리마발 ANSA 통신 기사에 담겨 다음 날 아침 산티아고의 라 나시온에 실렸다. 살리나스가 이끄는 위원회는 우루과이의 워싱턴 카탈디, 아르헨티나의 라울 도노프리오와 함께 아프리카, 아시아, 독일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임무에는 1974년 월드컵의 남미 출전권을 지키는 일과 라우스의 후임으로 아벨란제를 알리는 일이 포함됐다. 콜롬비아 축구 행정가 알폰소 세니오르가 이 계획을 발표했다. 위원회는 선거운동과 더불어, 전 대회 우승국 브라질의 출전권과 별개로 남미에 예선 통과 세 자리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할 예정이었다.

아벨란제를 후보로 내세운 페루인

테오필로 ‘티토’ 살리나스
테오필로 ‘티토’ 살리나스

살리나스는 1966년부터 남미축구연맹을 이끌었다. 남미 국가대표팀들은 국제무대에서 높은 명성을 누렸지만, 이 지역의 10개 회원 협회가 FIFA 선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다. 그는 그 지역을 대표해 발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지지를 확보하면 아벨란제에게 기반이 생겼다. 회장에 당선되려면 다른 지역에서도 동반자를 찾아야 했다.

아벨란제는 훗날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남미 축구 총회를 전후해 출마 이야기가 나왔다고 회고했다. 회의가 끝난 뒤 그는 티주카의 바비큐 식당에서 대표들을 대접했다. 남미축구연맹 회장이 일어나 그를 1974년 FIFA 회장 선거의 후보로 제안했다. 상파울루대학교 연구진이 2012년 녹음한 인터뷰에서 아벨란제는 자신이 그 약속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기억했다. 돌아온 답은 총회가 이미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남미의 축구 행정가들은 후보를 정했고, 그는 선거운동에 나서야 했다.

그에게는 강력한 이력이 있었다. 아벨란제는 1958년부터 브라질의 여러 종목을 관장하던 브라질스포츠연맹을 이끌었다. 브라질이 1958년, 1962년, 1970년 월드컵을 제패한 시기가 그의 재임 기간이었다. 펠레가 중심에 선 뛰어난 대표팀의 마지막 우승은 브라질 축구를 세계적인 볼거리로 만들었다. 살리나스가 정치적 조직력을 제공했다면, 아벨란제는 세계 챔피언의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유럽 밖의 표를 찾아서

FIFA 총회에서는 회원 협회마다 한 표를 행사했다. 새로 독립해 가입한 나라들은 대표팀이 월드컵 본선에 오르기 어려운 형편이어도 회장 선거에는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탈식민화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유권자를 늘렸다. 기존의 유럽 지도부는 고유한 요구를 품은 회원들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과 마주했다.

아벨란제는 직접 이 협회들을 찾아갔다. 2012년 인터뷰에서 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곳곳을 누빈 여정과 오세아니아, 중앙아메리카 방문을 회고했다. 인맥은 유럽의 주요 축구 도시라는 익숙한 울타리를 넘어 쌓였다. FIFA의 관심을 받는 일이 드물었던 행정가들 앞에 이제 회장 후보가 나타나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다. 월드컵 출전권 확대와 실질적인 지원은 그 대화에 공통의 목표를 부여했다.

1961년부터 FIFA 회장을 맡은 라우스에게는 아프리카에서 특히 불리하게 작용한 정치적 짐이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문제에 대응한 방식이었다. FIFA는 1961년 백인이 장악한 남아공 축구협회의 자격을 정지했지만, 1963년에는 그의 지지 아래 이를 잠정 복원했다. 총회는 1964년 다시 자격 정지를 결정했다. 인종 분리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그 협회를 받아들이려는 현직 회장의 태도는 그의 권위를 훼손했다.

남아공 축구 행정가들은 1966년 월드컵에는 백인으로만 구성된 팀을, 1970년에는 흑인으로만 구성된 팀을 보내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이는 국제대회에서도 인종 분리를 유지하는 방안이었다. 아프리카의 반대는 더욱 강해졌다. 축구사 연구자 폴 다비의 선거 연구가 보여주듯, 남아공 문제는 라우스와 아벨란제의 대결에서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도전자는 현직 회장의 노선에 오랫동안 맞서 온 행정가들에게 표를 구했다.

브라질, 환대를 외교로 바꾸다

브라질은 잠재적 우군들을 자국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1972년에는 독립 15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대회인 타사 인데펜덴시아를 열었다. 미니코파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 대회는 군사정부의 기념행사인 동시에, 아벨란제에게 외국 대표팀과 축구 행정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를 제공했다.

초청 대상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역사학자 브루누 두아르치 헤이는 1971년 7월 발표된 계획을 기록했다. 살리나스, 라우스, 다른 FIFA 관계자들, 아프리카 축구 행정가 테세마를 초청해 경기장을 둘러보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제안된 일정에는 브라질리아에서의 면담과 푸르나스 수력발전 단지 방문도 포함됐다. 축구를 매개로 한 환대에는 브라질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전시 효과가 더해졌다.

대회는 아벨란제의 국제 인맥을 강화했다. 1973년 11월 22일 오 에스타두 지 마투 그로수의 보도는 미니코파가 그의 명성을 높이고 중앙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같은 기사는 출마를 처음 제안한 인물로 살리나스를 지목했다. 또 11월 30일 리우에서 개막할 남미 축구 총회가 후보 지명을 공식화할 것이라고 전했다. 아벨란제의 거듭된 해외 방문과 살리나스의 남미 내 조직 작업은 이제 선거라는 한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살리나스는 그들이 도전하는 상대와 계속 협상해야 했다. 1973년 2월 그는 리마의 라 크로니카에 아벨란제의 출마가 남미가 라우스에게 반대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밝혔다. 남미축구연맹은 후임 후보를 밀면서도 현직 회장과 소속 대표팀들의 이해관계를 놓고 협상을 이어갔다.

더 큰 월드컵, 그곳에 도달할 지원

공약은 각 협회에 인정 이상의 것을 제공했다. 아벨란제는 재정·기술 지원, 감독과 심판 교육, 경기장 보조금, 청소년 대회,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클럽 대회 강화를 제안했다. 리그를 키우고 국가대표팀을 준비하며 국제대회 참가를 지속하려는 행정가들에게 필요한 수단들이었다.

가장 강력한 약속은 월드컵이었다. 세르지우 세타니 질리우의 연구에 소개된 계획은 당시 16개였던 본선 참가국을 1978년 20개, 1982년 24개로 늘리는 것이었다. 출전권이 추가되면 협회들은 국제축구의 중심에 있는 대회에 진출할 더 나은 기회를 얻게 됐다.

살리나스는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표들과 협상하며 이 제안을 활용했다. 남미는 기존의 자기 몫을 지키려 했고, 선거운동 진영은 다른 지역에 확장의 여지를 약속했다. 본선 규모를 키우면 이 목표들을 조율하기가 쉬워졌다. 아벨란제는 같은 연대 안에서 전통적인 축구 강국과 세계무대에 나설 첫 현실적인 기회를 찾는 협회를 함께 끌어들일 수 있었다.

결정적 총회에서 움직인 살리나스

1974년 6월 11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선거가 열릴 때도 연대는 계속 다져야 했다. 남미축구연맹의 언론 담당 비서 로베르토 메히아 알라르콘은 2015년의 증언에서 살리나스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지지를 지키려 노력한 과정을 설명했다. 그 회고는 알도 판피치와 동료들이 페루 축구의 운영 역사를 다룬 책 El otro partido에 실려 있다.

메히아의 설명에 따르면, 라우스 역시 해당 대표들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에 불확실성이 남아 있었다. 살리나스가 아벨란제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고, 브라질 후보는 휴회를 요청했다. 쉬는 동안 살리나스는 아벨란제가 함께한 자리에서 아프리카·아시아 행정가들과 다시 대화하며 지지 약속을 얻으려 했다. 수년간의 만남을 표로 바꿔야 하는 순간, 이 페루인이 어떤 일을 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FIFA 사무총장 조제프 블라터와 FIFA 회장 주앙 아벨란제.
FIFA 사무총장 조제프 블라터와 FIFA 회장 주앙 아벨란제.

아벨란제는 1차 투표에서 62표 대 56표로 앞섰다. 그러나 선거 규정상 그 차이로는 승부가 끝나지 않았다. 2차 투표에서 그는 68–52로 승리했다. 당시 르 몽드 보도는 122개 협회가 참석했고 결정적 투표에서 백지표 두 장이 나왔다고 기록했다. 라우스의 13년 재임이 끝났다. FIFA는 유럽 출신이 아닌 첫 회장을 선출했다.

승리 이후의 동맹

확대는 당초 계획보다 오래 걸렸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16개국 체제를 유지했고, 1982년 스페인 대회에서 24개국이 참가했다. 카메룬과 알제리가 아프리카를 대표했으며, 쿠웨이트·온두라스·뉴질랜드도 처음으로 본선 무대를 밟았다. 커진 대회는 아벨란제가 지지를 구하며 내세웠던 약속을 구체적인 현실로 만들었다.

살리나스와의 동맹은 결국 깨졌다. 1986년 니콜라스 레오스가 아벨란제의 지지를 받으며 페루인의 뒤를 이어 남미 축구의 수장이 됐다. 그해 4월 라 나시온과 인터뷰한 살리나스는 FIFA 회장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칠레의 미겔 나수르가 자신에게 아벨란제가 칠레에 레오스를 지지하라고 압박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한때 선거운동의 동료였던 두 사람은 적수가 됐다.

아벨란제는 1998년까지 FIFA 회장으로 재임했다. 그를 회장으로 만든 선거운동은 남미의 회의들에서 시작해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뻗어 갔고, 살리나스는 지지를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다. 회장 자리는 아벨란제에게 돌아갔지만, 그를 그곳에 올려놓은 것은 남미축구연맹과 아프리카 축구 지도자들, 아시아·중앙아메리카의 우호 협회들이 함께한 작업이었다.

출처: 판피치 외: 살리나스와 1974년 선거, 주앙 아벨란제: 2012년 인터뷰, 브루누 두아르치 헤이: 1972년 브라질 대회, 세르지우 세타니 질리우: 개혁 공약, AP통신: 선거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