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6년 10월 28일 늦은 밤, 당시 스페인의 광대한 페루 부왕령 수도였던 리마의 땅이 흔들렸다. 인근 항구 카야오에서 지진은 시작에 불과했다. 진동이 지나간 뒤 바다가 육지로 밀려와 항구를 덮쳤다. 280년 뒤에도 이 재난은 파괴로 기억되지만, 더 긴 역사는 생존자들이 답해야 했던 질문에 담겨 있다. 물과 식량은 어디서 구하고, 환자는 어떻게 돌보며, 도시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 지을 것인가?
당시 기록과 후대 역사 연구에 따르면 지진은 오후 10시 30분 무렵 발생했다. 18세기 관측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한 규모를 측정할 수 없으며 현대의 추정치도 다르다. 피해 범위는 그보다 덜 불확실하다. 리마 전역에서 건물이 무너지거나 크게 손상됐고 주요 종교·공공 건축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1746년 인쇄된 익명의 보고서는 배들이 물에 떠밀려 카야오 성벽 너머로 옮겨졌다고 전한다. 목격담 특유의 절박함과 한계가 있지만 침수의 위력만큼은 의심하기 어렵게 한다.
## 바다에 휩쓸린 항구
#3# 카야오는 리마의 바닷길 관문이었다. 사람과 물자는 이 항구를 통해 식민지 수도에 도착했다. 쓰나미는 항구의 건물과 방어시설을 파괴하고 주민 대다수의 목숨을 앗아 갔다. 2020년 페루 실험의학·공중보건 학술지에 실린 연구는 리마 사망자를 약 1,300명, 카야오는 약 3,800명으로 추정한다. 이 숫자는 당일 밤의 완전한 집계가 아닌 사후 재구성이다. 다른 역사적 추정치는 서로 다르며 이후 질병으로 숨진 사람은 더욱 세기 어렵다. 그럼에도 두 지역의 차이는 뚜렷하다. 지진은 내륙 도시를 파괴했고, 바닷물은 저지대 항구를 훨씬 더 치명적인 곳으로 만들었다.
리마 출신 학자 호세 에우세비오 데 야노 이 사파타는 1748년 마드리드에서 출판된 편지 또는 일기에 사건과 그 이후를 기록했다. 제목은 기록 기간을 1746년 10월 28일 금요일부터 1747년 2월 16일까지로 밝히며 계속되는 진동의 집계를 예고한다. 이 긴 기간은 중요하다. 파도가 물러갔다고 재앙이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파손된 집, 반복되는 흔들림, 수도를 먹여 살리던 항구의 상실에 직면했다. 일기는 극적인 하룻밤이 아니라 이어지는 비상사태의 증거다.
## 지진 뒤에 찾아온 위기
#5# 부왕 호세 안토니오 만소 데 벨라스코는 스페인 왕실을 대신해 페루를 통치했다. 재난 연구자들이 인용하는 그의 기록은 리마 중앙광장과 다른 광장, 정원, 들판에서 탁 트인 곳을 찾는 군중을 묘사한다. 손상된 집에서 나오는 것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지만, 노숙은 날씨와 질병에 노출되는 일이었다. 가장 가난한 주민들이 가장 적은 보호를 받았다. 건물을 잃은 도시는 일상 서비스를 유지해야 했고, 그 일을 하던 사람들 다수도 집이나 가족을 잃었다.
물은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지진은 식수와 제분, 주변 농업에 쓰이던 수로와 관을 파손했다. 제빵소와 저장시설은 무너졌으며 카야오 창고도 이전처럼 기능할 수 없었다. 부왕 행정부는 수로를 치우고 식량 공급을 복구하며 화덕을 다시 지었다. 의학사 연구자 카를로스 카르셀렌, 다니엘 모란, 라우라 아마도르에 따르면 밀은 칠레에서, 고기와 다른 물자는 내륙에서 들어왔다.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을 복구하려는 노력은 사람들을 살리려는 노력과 떼어 놓을 수 없었다.
환자가 더 많아진 바로 그때 병원들도 피해를 입었다. 같은 연구자들은 지진 후 1년간 리마의 산안드레스·산타아나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사망을 기록한다. 카야오 병원은 파괴됐다. 과밀과 외부 환경 노출, 열악한 위생, 물자 부족이 질병 확산에 영향을 줬다. 이후 사망자 수를 두고 역사 자료가 크게 엇갈리므로 하나의 깔끔한 총계는 불확실성을 가린다. 분명한 것은 위기가 무너진 벽과 침수에서 굶주림과 질병, 치료를 제공하기 위한 투쟁으로 옮겨 갔다는 점이다.
## 리마의 재건은 누가 결정할 것인가?
#8# 재건은 두 번째 갈등을 낳았다. 만소 데 벨라스코는 당시 리마에서 가르치던 프랑스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루이 고댕에게 안전한 건물 계획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고댕은 1746년 11월 더 넓은 거리, 더 낮은 건물, 무거운 볼트 천장의 축소, 갈대 골조에 미장재를 바르는 가벼운 퀸차 공법의 확대를 제안했다. 넓은 공공 공간은 건물이 무너질 때 모일 장소가 될 수 있었다. 역사학자 찰스 워커는 이런 생각이 도시와 주민을 규제하려는 식민정부의 더 큰 시도 일부이기도 했음을 보여 준다.
상층부를 제한하자는 제안은 저항에 부딪혔다. 리마의 부유한 소유주에게 2층은 생활공간이자 수입원이며 지위를 보여 주는 표시였다. 철거에는 돈이 들었고 노동력과 자재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당국은 높은 벽이 거리의 사람들과 작은 집의 주민들을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소유주들은 명령의 조건과 비용에 이의를 제기했다. 워커의 연구는 여러 해에 걸친 청원과 공문서를 추적한다. 결과는 완전히 새로운 도시의 빠른 건설이 아니라 협상을 거친 불완전한 개혁이었다.
카야오는 다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옛 항구는 여전히 유용했지만 물 바로 옆에서 민간 생활을 재건한다는 것은 쓰나미의 기억과 함께 사는 일이었다. 빅토르 에밀리오 알바레스 폰세의 연구는 옛 항구 자리에 군사 요새를 짓는 동안 민간인을 베야비스타로 옮긴 과정을 설명한다. 이주가 항구나 위험을 없애지는 않았다. 오히려 위험의 공간적 분포가 정부 정책의 일부가 됐음을 보여 준다. 가족이 살 곳, 요새가 설 곳, 해안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공적 선택의 문제가 된 것이다.
## 기록이 말해 주는 것과 말하지 못하는 것
#11# 남은 문서의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다. 식민지 관리들은 질서와 보급, 재건을 썼고, 초기 인쇄 보고서는 바다가 준 충격을 전했으며, 야노 이 사파타는 오랜 기간 진동을 기록했다. 후대 역사학자들은 빈민, 원주민, 노예가 된 주민을 비롯해 자료가 누구의 경험을 주변부에 남겼는지 물었다. 함께 읽으면 더 완전한 이야기가 되지만 모든 사망자의 명단, 정확한 현대적 규모, 이후 조치에 대한 생존자 전원의 견해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280주년은 지진 목록 속 날짜 하나 이상이다. 1746년 10월 28일 리마와 카야오는 같은 지질학적 사건을 겪었지만 서로 다른 상실을 경험했다. 그 뒤 몇 달은 수도가 항구와 급수시설, 병원, 그리고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의존하는지 드러냈다. 벽과 거리를 재건하는 일은 안전과 권력에 관한 논쟁이 되기도 했다. 기록보관소에 남은 그 논쟁 역시 재난의 역사다.
출처: 페루 가톨릭대학교 역사 연구, 의학·공중보건 연구, 찰스 워커의 재건 연구, 야노 이 사파타의 편지·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