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1년 5월 1일 엔트레리오스 주지사는 자신의 주가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에게 맡겼던 대외 관계 권한을 철회했다.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의 선언은 연방파 내부의 이견을 공개적인 도전으로 바꿨다. 아홉 달 뒤인 1852년 2월 3일, 그가 이끄는 군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카세로스에서 로사스를 물리쳤다.
이를 로사스가 연합주라는 별도의 나라와 싸운 사건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실제 역사는 더 복잡하다. 경쟁하는 지도자들은 같은 정치적 공간을 조직하려 했다. 누가 권력을 행사하고 지방들이 어떤 관계를 맺으며 통치에 필요한 자원을 누가 통제할지가 쟁점이었다.
연합주와 연방: 이름의 의미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는 독립과 국가 형성 과정에서 사용된 이름이다. 아르헨티나 연방은 연방 협약으로 발전한 지방 사이의 질서와 연결된 이름이었다. 명확한 국경을 사이에 둔 두 외국이 아니었다.
현행 헌법 제35조는 연합주, 아르헨티나 공화국, 아르헨티나 연방을 역사적 공식 명칭으로 인정한다. 이 연속성은 전쟁을 잘못 설명하는 일을 막는다. 로사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통치하면서 다른 지방이 위임한 권한을 행사했다. 이미 통합된 아르헨티나 공화국을 침략한 외국 통치자가 아니었다.
갈등은 로사스 이전에 시작됐다
독립은 새로운 정치 공동체의 권력 배분을 해결하지 못했다. 중앙집권 구상과 지방 권한을 지키려는 지도자들이 충돌했다. 대체로 단일파는 전국적인 중앙정부를, 연방파는 지방 자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 명칭들 안에는 바뀌는 동맹, 지역 이해관계, 각 진영 내부의 이견이 함께 있었다.
1820년 세페다에서 산타페와 엔트레리오스의 연방파 지도자들은 중앙 집정부의 군대를 물리쳤고 집정부는 무너졌다. 이후 지방정부들은 협약을 협상하면서도 공동 질서의 형태를 놓고 여러 차례 싸웠다. 폭력은 두 지휘관만의 다툼을 넘어 국가 건설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1828년 12월 후안 라바예가 연방파 주지사 마누엘 도레고를 축출하고 처형하면서 대립이 격화됐다. 로사스는 연방파의 주요 옹호자로 떠올랐다. 그는 무장 동원과 합의 붕괴가 이미 정치적 현실을 지배하던 1829년에 주지사가 됐다.
동맹과 강제로 구축한 권력
로사스는 1829~1832년, 다시 1835~1852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통치했다. 두 번째 정부는 행정·입법·사법 권한을 예외적으로 집중한 공권력의 총체를 부여받았다. 그는 질서를 새로운 내전의 위협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했다.
지주와 상인, 도시와 농촌의 대중 집단이 그를 지지했다. 붉은 연방파 표지는 충성의 표현이 됐다. 그러나 동의와 강제가 함께 존재했다. 반대자들은 박해를 받았으며, 당시를 다룬 교육 자료는 Sociedad Popular Restauradora와 마소르카를 위협과 탄압 장치의 일부로 설명한다.

로사스를 연방파라고 부른다고 해서 다른 연방파 지도자들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의 권력은 지방 동맹에 의존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특권적 위치를 유지했다. 정치적 소속과 실제 자원 배분의 차이는 왜 마지막 도전자가 같은 진영에서 나왔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세관도 전장이었다
1831년 1월 4일 연방 협약은 처음에 부에노스아이레스, 산타페, 엔트레리오스가 서명했다. 지방의 상호 권리를 인정하고 동맹을 맺었다. 또 무역, 항행, 일반 수입, 공공 부채 등을 조직할 연방 의회도 구상했다. 따라서 헌법 문제는 연방 협약 자체에 들어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와 세관 주변에 집중된 부와 영향력은 이 문제를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카사 로사다 박물관에 따르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관세·무역 통제와 제헌 의회 지연에 반대가 커졌다. 교역 접근성을 높이려던 지방들에는 제도적 분쟁이 곧 사용 가능한 자원의 문제였다.
의회, 하천 항행, 수입 배분은 서로 연결돼 있었다. 헌법은 주지사들과의 개인적 합의로 유지되던 균형을 바꿀 수 있었다. 법률 논쟁처럼 보이는 문제가 군대를 동원한 이유다. 돈과 권력의 규칙은 어느 지방의 이해가 우세해질지 결정할 수 있었다.
우르키사는 연방 동맹 내부에서 갈라섰다
엔트레리오스를 통치한 우르키사는 연방 정치 질서의 일원이었다. 1851년 선언은 위임한 대외 관계 권한을 되찾고 국가 조직을 주장했다. 단일파 강령으로 전향하지 않고도 로사스의 지도력에 도전했다.
반대 세력은 연합군이 됐다. 에헤르시토 그란데는 엔트레리오스와 코리엔테스, 우루과이, 브라질 제국의 지원을 받았다. 구성 자체가 지방 내부 갈등에 국제적 차원을 더했다. 카세로스를 단일파가 연방파를 이긴 사건으로만 설명하면 우르키사의 위치와 동맹의 폭을 지워 버린다.

카세로스는 로사스 정권을 끝냈다
1852년 2월 3일 우르키사의 연합군은 카세로스에서 로사스를 물리쳤다. 로사스는 사임하고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1877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연방의 정치 질서를 지배했던 지도자는 더 이상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를 통제하지 못했다.

이미지 출처: Fernando de Gorocica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웹사이트용으로 크기를 줄였으며 원본 사진을 자르지 않았다.
전투의 결정적인 결과는 정치 지도부의 교체였다. 대립을 낳은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승리는 우르키사에게 지방들을 소집할 기회를 줬지만, 전국 정부의 합의에는 전장 밖에서도 협상과 제도, 수용이 필요했다.
지속적인 합의보다 먼저 온 헌법
1852년 5월 31일 서명한 산니콜라스 협정은 산타페 제헌 의회의 기반을 마련하고 우르키사를 연방의 임시 지도자로 지정했다. 문서는 연방 협약을 원용했다. 앞선 약속을 새 제도적 체제의 근거로 사용한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협정을 거부하고 연방에서 분리됐다. 1853년 열세 지방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없이 헌법을 채택했다. 우르키사는 1854년 연방 대통령이 됐다. 전국 질서 속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위치를 둘러싼 분쟁은 계속됐다. 1861년 파본의 전투와 1862년 시작된 바르톨로메 미트레의 대통령직은 또 다른 권력 균형 변화를 보여준다.
누가 이겼고, 무엇이 남았나
카세로스의 직접적인 승자는 우르키사와 연합군이었다. 지속적인 헌법적 결과는 연방적인 국가 틀의 수립이었다. 그러나 다음 10년 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다시 주도적인 정치 위치를 확보했다. 동맹과 제도가 계속 바뀌는 갈등의 모든 결과를 한 번의 승리로 설명할 수는 없다.
결과에는 로사스의 몰락, 새로운 헌법 질서, 지속된 내전이 포함된다. 박해와 망명, 무장 동원은 그 과정에서 치른 대가였다. 카세로스는 주지사와 위임 권한으로 결속된 연방에서 헌법으로 조직된 국가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 길을 평화롭거나 즉각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출처: Educ.ar: 주권과 로사스 시대, 1831년 연방 협약, 카사 로사다 박물관: 영토 조직, 산니콜라스 협정, 카사 로사다 박물관: 우르키사의 대통령직
추천 도서와 자료
- 1831년 연방 협약 — Buenos Aires · Santa Fe · Entre Ríos
기사에서 설명한 협약 원문. 스페인어 무료 역사 문서.
무료 자료 - Historia de la Argentina 1806-1852 — Marcela Ternavasio
1806년부터 로사스의 몰락까지를 다루는 마르셀라 테르나바시오 책의 출판사 안내. 스페인어 유료 도서.
유료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