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버턴이 찍은 한 사진에는 이집트 노동자들이 좁은 철로 위의 작은 화차 옆에 서 있다. 화물은 투탕카멘 무덤 발굴 현장에서 나온 것이다. 사진에는 황금 마스크가 없다. 왕의 매장 유물을 땅속에서 꺼내는 데 필요했던 일이 담겨 있다. 사람과 운반 상자, 철로, 그리고 무덤 입구 너머까지 이어지는 작업이다.
이 발견은 흔히 영국인 고고학자 한 명과 부유한 후원자, 황금에 감탄한 순간으로 압축된다. 하워드 카터와 카나번 경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것은 맞다. 하지만 사진과 발굴 기록에는 더 큰 사업이 남아 있다. 이집트 노동자들의 일과, 유물이 놓여 있던 주변 환경이 사라지기 전에 하나씩 기록하는 치밀한 작업에 의존한 사업이었다.
발견에는 하루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다
1922년 11월 4일, 이집트 왕가의 계곡에 있던 고대 노동자들의 오두막 아래에서 계단의 첫 단이 드러났다. 카터의 일지는 흙과 잔해를 치우는 작업, 봉인, 불확실성을 기록한다. 문이 있다는 것은 무덤의 존재를 뜻했다. 그러나 누구의 무덤인지, 안의 유물이 어떤 상태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11월 26일, 바깥문을 열고 잔해로 가득한 통로를 비운 뒤 카터는 두 번째 봉인된 입구에 낸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일지에는 가구, 전차, 궤짝, 조각상이 등장한다. 전실에는 엄청난 수의 유물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봉인된 문이 발굴단과 왕의 매장실을 가로막고 있었다.
매장실은 1923년 2월 16일에 열렸다. 미라 조사는 1925년 11월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우리가 익히 아는 발견의 사진들은 약 10년에 걸친 발굴의 서로 다른 단계에 해당한다. 모두 같은 오후에 찍힌 사진처럼 취급하면 수년에 걸친 노동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발견으로 바뀌어 버린다.
유명한 첫 순간을 지켜본 사람들도 흔히 전해지는 이야기보다 많았다. 카터의 일지는 그가 구멍으로 안을 볼 때 카나번 경, 그의 딸 에블린, 아서 캘린더와 함께 원정대의 이집트인 작업반장들인 ‘레이스’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글은 반장들에게 문턱의 자리를 돌려주지만, 각자의 목소리까지 남기지는 않는다.
사진 가장자리에 남은 사람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카터가 출판한 기록에 나오는 네 명의 이집트인 작업반장을 확인한다. 아흐메드 게리가르, 후세인 아흐메드 사이드, 가드 후세인, 후세인 아부 아와다. 이름의 철자는 출판물마다 다르다. 이름이 인쇄물에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예외적이다. 현장에서 일한 이집트인 발굴 인부, 노동자, 아이들 대부분은 사진 기록 속에서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한 버턴의 사진 한 장에는 작업반장 두 명과 어린 조수가 매장실을 막은 칸막이를 해체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누구도 개별적으로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사진은 그들이 일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 그 자체로 이름을 되찾아 주지는 않는다. 후대의 설명문이 익명의 인물을 특정 역사 인물로 연결하려 할 때 이 구별은 중요하다.
철로 사진은 작업의 또 다른 부분인 운송을 보여 준다. 유물은 원래 위치에서 옮겨져 처리와 포장을 할 장소에 도착한 뒤, 다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해야 했다. 화차 옆의 노동자들은 이 노동의 연쇄를 보여 주는 증거다. 그들도 발굴에 참여했다. 다만 아카이브는 발굴 이후 그들의 삶을 따라갈 단서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이 사람들을 이야기 속으로 되돌리는 데 또 다른 단독 발견자를 만들어 낼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이야기를 바라보는 범위를 넓히는 일이다. 카터가 발굴을 지휘했고, 이집트인 작업조가 매일의 진전을 가능하게 했다. 남아 있는 기록에서 이름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것은 원정대가 자신을 설명한 방식을 반영한다. 개인의 기여를 정확하게 측정한 결과는 아니다.
사진가는 왜 꼭 필요했나
버턴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이집트 원정대에서 일하던 숙련된 사진가였다. 미술관은 그를 카터의 발굴에 지원했다. 이후 수년에 걸쳐 그는 무덤과 그 안의 유물을 담은 유리 건판 네거티브를 약 1,400장 제작했다. 투탕카멘을 전 세계에 알린 사진들은 동시에 발굴의 기술적 기록을 이루었다.

때로 가장 많은 것을 알려 주는 사진은 거의 아무것도 옮겨지지 않은 장면이다. 전실을 찍은 한 사진에서는 분해된 전차와 가구가 좁은 공간을 채운다. 다른 사진에는 유물 사이로 참조 번호가 적힌 작은 카드들이 놓여 있다. 이 번호는 사진을 유물의 식별, 설명, 후속 처리 체계와 연결한다.
유물을 옮기면 주변의 증거도 바뀐다. 밖으로 가져간 궤짝을 나중에 옆의 침대, 그릇, 전차와 원래 맺고 있던 정확한 관계 속에서 다시 촬영할 수는 없다. 버턴의 사진은 그 관계를 보존했다. 도면과 유물 카드에 사진을 결합하면 각각의 발견물을 처음 발견한 배치에 계속 연결할 수 있었다.
발굴 사진이 아름다운 고대 유물을 보여 주는 삽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이유다. 박물관 전시는 선별과 이동, 보존 처리를 거친 뒤의 유물을 보여 준다. 그보다 앞선 사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한 단계를 기록한다. 연구자는 고립된 유물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위치와 작업 절차의 문제를 사진에서 살펴볼 수 있다.
꺼내는 과정도 견뎌야 했던 보물
작업 대상은 5,000점이 넘는 유물이었다. 상당수는 보존에 필요한 조건이 서로 다른 재료들을 결합해 만든 물건이었다. 무덤을 연 것은 수습의 시작이었다. 카터의 일지는 내용물을 기록하고 꺼낼 준비가 진행될 때 화학자 앨프리드 루커스와 버턴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도착했다고 적고 있다.

카터와 캘린더가 유물을 살펴보는 사진은 이 사업의 덜 극적인 단계를 포착한다. 발견은 개별 유물에 대한 결정의 연속이 되었다. 설명과 사진 촬영, 처리, 포장은 결국 대중이 보게 될 결과에 필수적이었다. 오랜 반출 작업도 발견의 역사에 속했다. 발견이 끝난 뒤의 공백기가 아니었다.
사진의 날짜도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출판일은 독자들이 사진을 처음 본 시점을 말해 줄 수 있다. 업로드 날짜는 디지털 사본이 웹사이트에 들어온 때만 알려 준다. 어느 쪽도 자동으로 촬영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첫 발굴 시즌과 이후 매장 및 미라 조사 작업을 구분하려면 아카이브의 설명과 발굴 기록을 확인해야 한다.
이야기를 여전히 바꿀 수 있는 아카이브
카터는 193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조카 필리스 워커는 1945년 발굴 아카이브를 옥스퍼드의 그리피스 연구소에 기증했다. 남아 있는 자료에는 일지, 서신, 그림, 도면, 유물 카드, 사진이 있다. 이 자료들은 매장 유물의 놀라운 풍부함과 그것을 발굴한 사람들이 내린 결정을 함께 보존한다.
2025년 11월, 연구소는 ‘투탕카멘 공간 아카이브’의 베타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이전에는 함께 찾아보기 어려웠던 기록들을 연결한다. 미라 조사 자료부터 시작해 추가 문서를 더하고 있다. 오래된 발굴에 접근하는 새로운 통로이며, 새로 발견한 무덤이나 모든 노동자의 삶을 완전히 재구성한 결과는 아니다.
일지를 사진과 나란히 읽으면 차이가 드러난다. 일지는 특정 날짜를 확인하거나 절차를 설명할 수 있다. 사진은 원정대에 연결된 이름들에서 빠진 사람들을 보여 줄 수 있다. 어느 쪽도 완전한 기록은 아니다. 그러나 함께 읽으면 익숙한 개인의 승리담이 화면 밖에 남겨 둔 세부를 드러낸다.
전차들 사이의 참조 카드는 황금 옆에서 지나치기 쉬울 만큼 작다. 하지만 그것은 발견이 어떻게 지식이 되었는지 설명한다. 유물마다 위치와 번호, 기록이 있었다. 철로의 화차 옆에 선 사람들에게도 같은 관심이 필요하다. 그들의 이름은 여전히 없을지 몰라도, 그들의 노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버턴의 카메라가 사진 속에 남겨 놓았다.
출처: 카터의 첫 발굴 시즌 일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벽의 해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버턴의 사진, 옥스퍼드: 발굴 아카이브, 그리피스 연구소: 공간 아카이브
추천 도서와 자료
- 투탕카멘 공간 아카이브 둘러보기 — 그리피스 연구소, 옥스퍼드 대학교
사진, 도면, 유물 카드, 일지를 연결하는 무료 영어 아카이브. 베타 컬렉션에 자료를 추가하고 있다.
무료 자료 - 카터의 첫 발굴 일지 읽기 — 하워드 카터 · 그리피스 연구소
1922–1923년 발굴 시즌의 영어 1차 자료. 전사본과 원래 기록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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